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치규(穉圭), 호는 규당(規堂). 일명 안병찬(安炳瓚). 충청남도 청양 출신. 안창식(安昌植)의 아들이다.
1894년 홍주의 교임(校任)으로 재직 중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당시 초토사(招討使) 이승우(李勝宇)와 함께 민요(民擾)를 평정하는 데 일익을 맡았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충청도 방면에서 제일 먼저 의거의 기치를 올린 홍성에서 아버지와 김복한(金福漢)·이설(李偰)·임한주(林翰周)·이근주(李根周) 등과 함께 홍주의진을 형성하여 참모로서 활동하였다.
동학농민운동 평정의 공으로 관찰사로 승진해 와 있던 이승우를 의병장으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오히려 배신당해 안병찬을 비롯한 홍주칠의사(洪州七義士)가 모두 잡혀 10년 유배형을 받았다가 특사로 풀려났다. 석방 후 홍릉주사에 제수되었으나 받지 않고 고향에 돌아갔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김복한과 이설이 반대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자신은 “대권이 모두 일인에게 넘어갔으니 천 장의 상소, 만 장의 공문서가 무슨 소용이랴.” 하면서 수천 명의 군사를 모아 1906년 합천(合川)에서 접전하였다. 그러나 이미 왜병의 병참소가 사방에 널려 있고 일진회원이 곳곳에 있어 패전하였다.
그 해 2월 23일 박창로(朴昌魯) 등 40여 명과 함께 잡혔다가 4월 12일 풀려났다. 다시 의병을 모아 4월 16일 민종식(閔宗植)을 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참모역을 맡았다. 1만여 명으로 구성된 홍주의진은 그 해 윤4월 9일 적의 포위공격으로 성이 함락되고 82명 사망, 145명이 잡히고 그 중 80명이 경성으로 압송되는 참패를 당하였다.
자신은 간신히 피신했으나, 1907년 10월 1일 아우 안병림(安炳琳)·윤난수(尹蘭秀)·이필한(李弼漢)·조광희(趙光熙) 등 5명과 함께 홍주의진과 관련된 인물을 조사할 때 공주로 압송되었다. 1919년에는 파리 만국강화회의에 보내는 장서서명사건으로 또다시 옥고를 치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