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계중(繼仲), 호는 한설당(閒說堂). 전라남도 보성출신. 아버지는 안세헌(安世獻)이다.
효우학행으로 유림의 포상천거를 받았으나 벼슬에는 뜻이 없어 평생을 한설당에서 글벗들과 시문에 힘썼다.
1747년(영조 23)에 유교적 도덕을 기반으로 한 자신의 생활윤리를 연작시조로서 시조 24수와 가사 1편과 함께 같은 제목의 한시문을 지었다. 그가 국문으로 시조와 가사를 짓게 된 동기는 증조부인 안욱(安彧)이 김인후(金麟厚)와 임억령(林億齡) 등과 사귀던 집안이었던 데에 있다.
이른바 호남가단의 중심지였던 담양, 장성의 인물들이 많은 국문시가를 지음으로써 보성의 한설당 집안에까지 그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이러한 지연과 인맥을 따라 「한설당(閒說堂)」 25가(시조 24수와 가사 1편)도 나올 수 있었으며, 17세기에 보성에서 가사 「남초가(南草歌)」를 지은 박사형(朴士亨)의 영향도 직접적으로 입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가 남긴 시조 24수에는 저마다 소제목을 붙였는데, 가사의 소제목은 「명분설(名分說)」이다. 저서로는 문집 『한설당유고(閒說堂遺稿)』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