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순흥(順興). 호는 죽남(竹南), 자는 사휴(士休). 아버지는 안정진(安廷震)이며, 어머니는 창원황씨(昌原黃氏)로 황기한(黃綺漢)의 딸이다. 광천리(廣川里)에서 출생. 사승(師承)없이 가학으로 학문을 닦았다.
기억력이 뛰어나 한 번 글을 배우면 모두 암송하였다. 12, 3세에 과거공부를 시작하여 약관이 되어서는 시(詩)·부(賦)·표(表)·책(策)·경의(經義)는 물론, 선기옥형(璇璣玉衡)·기삼백(朞三百) 등 천문역수(天文曆數)에 이르기까지 박학한 학자가 되었다.
1849년(헌종 15) 24세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합격, 그 해에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으나 부모를 시봉하고자 부임하지 않았다. 그 후 1851년(철종 2) 승정원가주서가 되고, 1860년 사간원정언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지평에 승진되었다.
안치묵은 붕당(朋黨)의 폐습을 배격하고, 「육조소(六條疏)」를 제진하여 당시의 시폐(時弊)로 지적되었던 과거의 부정을 없애고, 언로를 넓히며, 사치를 근절할 것 등 6가지의 구폐책(救弊策)을 진언하였다. 안치묵은 관직생활을 함에 있어서는 항상 공과 사를 분명히 구분하였으며, 불우한 입장의 백성들의 편에 서서 공무를 수행하였다. 저서로는 『죽남문집(竹南文集)』 4권 2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