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순흥(順興). 평안남도 평양 출신. 호는 동오(東吾).
1905년 을사조약 후 평양에서 협동사(協同社)를 설립, 실업구국운동에 종사하였으며, 이승훈(李昇薰) · 최응두(崔應斗) 등과 상민공동회(商民共同會)를 조직하였다.
1907년 양기탁(梁起鐸) · 안창호 · 전덕기(全德基) 등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 결사인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 평안남도 총감(總監)이 되고 신민회 최고위간부로 활동하였다. 1909년 신민회 사업의 일환으로 평양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을 설립하였으며, 또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의 발기인으로 초대 총무에 선임되었다.
1909년 이재명(李在明)의 이완용(李完用) 자격의거(刺擊義擧)가 일어나자 연루자로 지목, 일본 헌병대에 붙잡혀 2개월간 혹독한 고문을 당하며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910년 신민회의 긴급간부회의에서 독립전쟁전략을 채택하고 만주에 무관학교와 독립군 기지 창건사업을 실행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이 회의에 평안남도 대표로 참석하여 군자금과 이주민 모집을 분담하였다.
1910년 일어난 안명근사건(安明根事件)을 기회삼아 일제가 간도(間島)에 독립군 기지를 설치하려는 운동을 저지하려고 양기탁 등을 붙잡을 당시 보안법 위반으로 일본 헌병대에 붙잡혀 1911년 7월 징역 2년형을 언도받았다. 일제가 신민회를 탄압하고 해체하기 위해 데라우치총독암살음모사건을 조작하여 1911년 9월 전국의 신민회 회원 800여 명을 검거하고 기소할 때, 복역중 재기소되어 1912년 9월 징역 10년형을 언도받았다.
이 재판 과정에서 정확한 기억과 물증까지 제시하며 데라우치총독암살음모사건이 날조되었음을 조리있게 폭로, 일본 재판부를 궁지에 몰아넣는 완강한 공판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1913년 7월 공소심에서 징역 6년형을 언도받고 양기탁 등과 5년을 복역하였다.
1916년 출옥하자 바로 만주로 망명,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을 추진하기 위해 임시정부와 협의하려고 상해로 갔다가 병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