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청양 출신. 향리에서 도학을 강구하고 후진교육에 전념하던 가운데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이듬해 음력 4월 중순 정산(定山: 지금의 청양)에서 은거하던 전참판 민종식(閔宗植)이 홍산(鴻山)의 지치(芝峙)에서 의거하였다.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4월말 홍주성을 함락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신보균(申輔均)·신현두(申鉉斗)·이식(李侙) 등과 홍주의진에 합류하여 참모사에 임명되었다. 이 때 총순과 순사 등 3명과 왜병 30여 명을 생포, 사살하는 전공을 세웠다.
그 뒤 홍주성으로부터 패주한 관군과 일본군이 홍주성을 재탈환하고자 대공세를 감행하자 수일간의 공방전을 전개하며 성을 사수하였으나, 윤4월 9일 새벽전투에서 패전하여 동지 80여 명과 함께 적의 포로가 되었다.
서울로 압송되어 일본군사령부에서 심문을 받던 중 적이 제공하는 식사를 거절하는 등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그 해 7월 윤석봉(尹錫鳳) 등 70여 명이 석방되고, 남규진(南奎振)·유준근(柳濬根)·이식·신현두·이상구(李相龜)·문석환(文奭煥)·신보균·최상집(崔相集)과 함께 유죄선고를 받고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얼마 뒤 태인에서 의거한 최익현(崔益鉉)이 이 곳으로 유배되어 오자 시와 학문을 논하였으며, 동지와 함께 최익현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국권상실 후 풀려나 향리에서 주경야독하며 지냈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