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고구려의 양근군(楊根郡, 또는 恒陽郡)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빈양(濱陽)이라고 고쳐 기천군(沂川郡)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 초에 다시 양근현으로 바꾸어 1018년(현종 9) 광주목(廣州牧)에 속하게 하였다가 1175년(명종 5) 감무를 두었다.
1257년(고종 44) 현명을 영화(永化)로 고쳤고, 1269년(원종 10) 위사공신(衛社功臣) 김자정(金自廷)의 고향이라 하여 익화현(益和縣)으로 승격시키고 현령을 두었다.
1356년(공민왕 5) 다시 군으로 승격시켰으며, 1658년(효종 9) 지평군(砥平郡)과 통합시켰다가 1668년(현종 9) 복구되어 군이 되었다. 영조ㆍ정조 때에 각각 현으로 강등시켰다가 복구하여 군으로 환원하였다. 1747년(영조 23) 치소를 건지산(乾止山) 부근에서 갈산(葛山)으로 옮겼다.
1895년(고종 32) 강원도 춘천부에 속하였다가 다음해에 경기도의 양근군(楊根郡)이 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지평군과 합쳐 양평군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남한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어 교통의 요지였다. 평구도(平邱道)의 오빈역(娛賓驛)이 있어 북쪽의 봉안(奉安), 남쪽의 쌍수역(雙樹驛)과 연결되었으며, 용진도(龍津渡)를 건너 광주(廣州)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