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1월 21일에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지정면적은 101,242㎡이다. 양산부부총(梁山夫婦塚)이 있는 양산읍 북정리의 남쪽 산기슭 경사면에 크고 작은 고분 50여기가 분포되어 있다. 봉토가 대부분 유실된 것을 2004년부터 양산시에서 고분정비작업을 실시하여 지상에 노출된 중·대형분은 대부분 복원되었다.
이 고분군은 인접한 양산 북정리고분군과 같은 지역에 계곡을 사이에 두고 구분되어 있다. 그러나 실상은 같은 성격의 고분군으로 유구나 출토 유물의 특징도 동일하다. 1990년과 2005년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부분적으로 발굴 또는 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대형분으로 비교적 잔존상태가 양호한 1호분 발굴조사 결과에 의하면 봉분은 유사판축으로 축조된 원형이며 직경 14m의 가장자리에는 할석을 2∼3단으로 놓은 호석열이 있다. 내부 돌방은 등고선과 나란한 남-북 장축으로 생토층을 깊게 굴착해서 묘광을 구축하고 북쪽 단벽 상단 전체를 입구로 삼은 석축으로 된 앞트기식 돌방[橫口式石室]이다. 돌벽은 네 벽을 바닥에서 수직하게 7단까지 동시에 축조하다가 북벽 부분은 마감하여 여기를 입구부로 삼고 나머지 세 벽은 천정석 높이까지 다시 쌓았다. 이때 입구가 있는 북벽은 나머지 세 벽 높이의 절반 정도이고 양쪽 장벽 상단부는 약간 내경하는 경향이었다. 천정에는 화강암제 장대석 6매를 단벽과 나란하게 걸쳐 놓은 평천정을 이루었다. 바닥에는 중간에 장벽과 나란하게 철(凸)상의 관대(棺臺)를 설치하고 양쪽 단벽 아래는 공간으로 남겨 유물을 부장하였다. 관대는 할석을 4단 높이로 쌓고 그 사이를 자갈로 채운 형태이며 유물이 부장된 공간에는 생토면에 자갈을 깔아둔 상태였다. 입구부에는 북쪽 단벽 상부와 나란한 높이로 묘갱 외연부를 경사지게 나팔상으로 굴착한 묘도가 있고 그 내부에는 할석으로 된 폐쇄석이 소복하게 채워져 있었다. 이렇게 완성된 돌방은 인접한 북정리 부부총과 같이 내부 네 벽과 천정에 백색 점토를 도장하고 마감하였는데, 조사 당시 바닥면에 벽면과 천정에서 탈락된 점토덩어리가 곳곳에 쌓여 있었다.
돌방은 길이 418㎝, 폭 140㎝, 높이 250㎝이고 관대는 길이 290㎝, 폭 140㎝, 높이 64㎝이며 입구부 북벽 높이 118㎝, 묘도 길이 78㎝, 폭 52㎝이다. 유물은 대부분 도굴되고 구석쪽 단벽 아래 공간과 관대 부분에서 굽다리접시[高杯], 뚜껑[蓋], 적갈색 토기와 마구장식품, 띠고리[鉸具], 띠끝꾸미개[帶先金具], 쇠도끼[鐵斧], 쇠낫[鐵鎌], 작은손칼[小刀子] 등이 출토되었다.
그밖에 나머지 홑덧널식〔單槨式〕소형분들은 구조적으로 대형분과 같이 입구를 북쪽에 두는 앞트기식 돌방이 대부분이지만 시기적으로 늦은 고분은 돌방의 폭이 넓어지고 입구가 남쪽으로 이동되어 있다. 또 여러덧널식[多槨式]은 지형상 낮은 곳에 주곽이 배치되고 높은 곳에 독널[甕棺]이나 돌널[石棺], 돌덧널[石槨] 등 소형유구가 배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2005년 정비복원을 위한 시굴조사에서도 대·소형분 53기가 확인되었는데 유구나 유물의 특징은 앞서 서술한 내용과 동일한 것으로 밝혀졌다.
신기리고분군은 돌방의 구조나 출토 유물을 감안하면 6세기에서 7세기 전반에 걸쳐 축조된 신라고분이라고 할 수 있다. 고분군의 중심연대는 6세기이며 해발이 낮은 곳에 위치한 고분이 높은 곳에 위치한 고분보다 축조 시기가 다소 앞서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고분군은 양산지역을 통치했던 중간 계층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인접한 북정리고분군의 중형분과 성격이 거의 유사하여 상호 긴밀한 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