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경섭(景涉). 양응기(梁應箕)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양산립(梁山立)이고, 아버지는 훈련원첨정 양인용(梁仁容)이다. 어머니는 풍산홍씨(豊山洪氏)로, 홍진(洪縝)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재기(才氣)가 남달랐고 궁마(弓馬)에도 능하였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독서한 지 10여 년만에 경사(經史)에 통달하였고, 1610년(광해군 2)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이이첨(李爾瞻)이 양위남의 재행을 듣고 사람을 시켜 불렀으나, 권문(權門)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하여 과업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안방준(安邦俊)과 더불어 강론하며 세월을 보냈다.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격문을 돌려 100여명을 모아 의병을 조직하고 여산(礪山)까지 나아갔으나, 적병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북향재배한 뒤 돌아왔다. 뒤에 중부참봉(中部參奉)에 임명되지만 모친상을 당하여 상례를 극진히 하다가 병을 얻어 죽었다. 조정에서는 효행을 높이 평가하여 정려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