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헌수 승전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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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강화 양헌수 승전비각 정측면
강화 양헌수 승전비각 정측면
근대사
유적
국가유산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에 있는 조선후기 무신 양헌수 관련 기적비.
시도자연유산
지정 명칭
양헌수 승전비(梁憲洙 勝戰碑)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지정기관
인천광역시
종목
인천광역시 시도기념물(1995년 11월 15일 지정)
소재지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산42번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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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에 있는 조선후기 무신 양헌수 관련 기적비.
내용

1995년 인천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에 있다.

화강암으로 건립된 비의 총 높이는 181cm, 비신(碑身)의 높이는 163cm, 폭은 60cm, 두께는 27cm이며 단층 1칸의 비각 내에 안치되어 있다. 비 앞면에는 ‘순무천총양공헌수승전비(巡撫千摠梁公憲洙勝戰碑)’라고 음각되어 있고, 비 뒷면에는 병인양요 양헌수 장군의 공적이 수록되어 있다.

양헌수는 1848년(헌종 14)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865년 제주목사를 거쳤다. 1866년 프랑스군대가 강화도를 침공 점거하자, 경초군(京硝軍)과 포수 총 549명을 거느리고 통진에서 강화도에 잠입하여 정족산을 점거하고, 11월 9일 산성을 공격하는 프랑스군 160명과 격전을 벌였다.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6명이 사살된 것을 포함하여 60∼7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프랑스군은 다음날인 11월 10일 강화도를 철수하였다. 정족산성 전투에서 양헌수의 군대는 전사 1명, 부상 4명의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 화력이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전과를 올린 것은 양헌수의 뛰어난 전략 때문이다.

참고문헌

『정족산성접전사실(鼎足山城接戰事實)』(양헌수)
『인천의 문화재』(인천광역시, 1995)
『경기인물지(京畿人物誌)』 상권(上卷)(경기도, 1991)
『경기도문화재대관(京畿道文化財大觀)-경기도지정편(京畿道指定篇)』(경기도, 1990)
『증보(增補) 강화사(江華史)』(강화문화원, 1983)
『경기금석대관(京畿金石大觀)』(경기도, 1982)
「열강의 침입과 ‘강화도조약’」(이완재,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 1997)
「로즈함대의 내침(來侵)과 양헌수의 항전」(김원모, 『동양학(東洋學)』 13,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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