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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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얼어 굳어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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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얼어 굳어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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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점은 0℃이다. 보통은 육방정계의 결정으로 되어 있다. 우리 나라는 온대권에 속하기 때문에 겨울에는 어디서나 얼음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여름철에 얼음으로 더위를 면하고 부패를 막아 보자는 것은 예로부터 인류의 강력한 욕망이었다.

여름철에 얼음을 얻으려면 높은 산 위의 얼음을 운반하였다. 또는 겨울철에 강이나 호수의 얼음을 빙고(氷庫)에 저장해 두었다가 사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주례(周禮)』에 의하면 주나라에는 능인(凌人)이라는 직명이 있었다. 겨울철에 산에 들어가서 얼음을 소요량의 3배 정도로 잘라 내어서 빙고에 저장하는 일을 담당하였다고 한다. 또, 『시경』 빈풍(豳風)에서 “12월이 되면 얼음을 탕탕 깨어 정월에는 빙고에 넣었다가……”라고 하였다.

『춘추좌전(春秋左傳)』에서는 “얼음을 저장할 때는 심산궁곡(深山窮谷)의 그늘지고 매우 추운 데에서 떠내다가 저장한다. 그것을 여름철에 꺼내어 고관(高官)들이나 손님의 접대, 장례식, 제사 때에 나누어 쓰게 하였다. 얼음을 저장할 때는 염소를 희생으로 바쳐 사한(司寒: 북방신)에 제사를 지냈다.

3월이나 4월 초에 빙실의 문을 열었다. 임금이 첫 번째로 사용하고 대부(大夫)·늙은이·병자에게 얼음을 나누어 주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은 일찍부터 얼음을 저장하는 방법이 있었음을 알게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부여에서는 여름철에 사람이 죽으면 얼음을 쓴다고 하였다. 또, 『삼국유사』에는 신라 유리왕 때에 장빙고(藏氷庫)을 만들었다는 것이 나온다.

『신당서(新唐書)』에는 “신라에서는 여름철에 음식을 얼음 위에 둔다.”는 말이 나온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505년(지증왕 6) 왕이 얼음을 저장해 두었다가 쓰라는 영을 내렸다. 『삼국사기』 직관지(職官志)에는 얼음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관아를 빙고전(氷庫典)이라 하였다. 빙고전에서는 얼음을 저장하였고 왕이나 고관들에게 얼음을 대주었다.

경주에는 삼국시대부터 석빙고(石氷庫)가 있었다. 지금의 석빙고는 입구에 “숭정 기원후 재신유 8월 이기개축(移基改築)”이라 새겨져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1741년(영조 17)에 이곳을 개축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주조는 마치 고분과 같다. 화강암으로 안팎 두 방을 만들어 바깥방에는 문이 있었던 흔적이 있다. 복사열을 최소한으로 줄이려고 천장의 흙 두께를 알맞게 하였다. 매우 과학적이다.

고려시대에도 빙고의 제도가 이어졌다. 『고려사』 예지(禮志)에 의하면 빙고를 열 때는 돼지 한 마리를 차려 놓고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이 얼음은 높은 벼슬에 있는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1036년(정종 2) 17명의 신하들에게 10일에 한 번씩 얼음을 나누어 주었다는 것이다. 『고려사』 열전(列傳)에는 최이(崔怡)가 강화도 이서산에 많은 사람을 동원하여 빙고를 만들었다. 그래서 백성들이 한없이 괴로워하였다는 것이다.

고려시대 빙고의 위치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개성 또는 그 부근의 강변 가까이에 저장해두거나 보다 추운 북쪽 지방에 저장해 두었다가 여름철에 운반하여 썼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규태(李圭泰)의 설에 의하면 보다 기온이 낮은 평양에 빙고를 두고 발이 빠른 장사를 시켜서 서울인 개성까지 날마다 운반하여 먹었다고 한다. 평양에서 개성까지 나르는데 3척입방의 얼음을 나른다. 개성에 도착하였을 때에 얼음이 1척입방보다 더 녹아서 줄어들면 볼기를 맞고 옥살이를 해야 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빙고의 제도는 이어졌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얼음에 관한 많은 기록이 나타난다. 1398년(태조 7)에 얼음을 저장하였다. 1449년(세종 31)에는 사대부의 시제(時祭)에 얼음을 내렸다. 1450년(문종 즉위년)에는 당상관(堂上官)의 집에 얼음을 고루 내리도록 하였다.

1454년(단종 2)에는 얼음저장을 금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1456년(세조 2)에는 해마다 70세 이상의 당상관에 얼음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1470년(성종 1)에는 절의 공양에는 동빙고의 얼음을 사용하게 하였다.

1504년(연산군 10)에는 예조에서 얼음을 더 많이 내려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왕은 궁중에서 쪽물염색에 얼음을 쓰기 때문에 허가하지 않았다. 1546년(명종 1)에는 문소전(文昭殿)에 빙반(氷盤)을 배설하여 실내를 써늘하게 하였다. 1768년에는 산릉(山陵)의 제사에는 얼음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한강 강변에 동서 두 빙고를 두었다. 『한경지략(漢京識略)』에 의하면 “동고는 ○개(豆毛浦 모두포: 지금의 옥수동)에 있다. 제사용 얼음만 진공하고, 서고는 둔지산(屯智山: 지금의 서빙고국민학교 근처)에 있다. 궁중의 부엌과 백관(百官) 등에 공급한다.”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1746년에 봉상시(奉常寺)에서는 동빙고의 얼음은 제사에만 쓰라고 가르치고 있다. 1470년에는 부처를 공양하는 데에 동빙고의 얼음을 쓰라고 하였다.

『용재총화(悀齋叢話)』에서는 “중랑천(지금의 청계천)의 더러운 물을 피하여 두모포와 저자도 사이의 강물이 4치쯤 얼었을 때에 잘라 낸다.”고 설명하였다. 그런데 동빙고는 연산군 때 사냥터를 확장하기 위하여 서빙고 동쪽으로 이전하니 사실상 서빙고에 통합되고 말았다. 서빙고는 1898년까지 존속되었다.

『한경지략』에서 말하기를 “해마다 섣달에 사한제(司寒祭)를 올리고 한강의 얼음을 깨어다가 보관하였다. 춘분에 개빙제(開氷祭)를 올리고 얼음을 진공한다. 또, 내빙고(內氷庫)가 있어서 어공(御共)만 전문으로 맡아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얼음공급의 시기·양·대상인물 등에 관한 규정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빙고 속의 얼음은 계절이나 보관법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얼음은 막대한 양이었고, 이것을 녹지 않게 보관하기 위한 백성들의 부역이 가혹하였다. 그래서 빙고의 얼음을 누빙(漏氷)이라고까지 불렀다고 한다.

『용재총화』에는 “얼음을 채취하는 데에 많은 군인이 동원된다. 빙고의 얼음을 꺼낸 뒤 8월에 군인들을 빙고에 보내어 빙고 내부를 수리한다. 겨울철에는 칡줄기를 얼음 위에 깔아 미끌어지지 않게 한다.

강가에 장작불을 피우고 의약을 준비하여 얼음을 넣을 준비를 한다. 또, 압도(鴨島)에 가서 갈대를 베어서 빙고의 아래위와 사방을 덮도록 한다. 그러면 얼음이 잘 녹지 않는다.

그런데 빙고관리의 관리들이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일을 아전들에 맡기더니 계축년에 얼음저장이 소루하여 파면되었다. 갑인년에 관리들은 성의를 다 하였다. 그래서 을묘년에는 나라의 대상(大喪)과 사신들에 대한 잔치에 얼음이 부족하지 않았고 가을에도 빙고에 얼음이 남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빙고는 경주의 석빙고 외에도 경상남도의 창녕, 경상북도의 성주·안동·현풍·청도, 황해도의 해주 등지에도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경상북도 의성군 빙계동, 경상남도 밀양군 산내면 등과 같이 여름철에도 고드름이 달리는 빙혈이 도처에 있다. 그래서 빙고 이상의 냉장·냉동의 구실을 하고 있다.

얼음은 냉장·냉음료·실내냉장·치레 등 가지가지 용도가 있다. 1881년(고종 18)의 <동궁마마 가례시 기명발기>에 얼음전용의 빙도(氷刀)가 나온다. 그리고 김칫독을 얼음이 들어 있는 궤 속에 넣어 저장하는 저빙궤(菹氷櫃)가 나온다.

얼음은 1910년에 부산수산시장에서 비로소 인조제빙을 시작하였다. 얼음에 소금을 섞어서 -20℃까지 냉각하여 아이스케이크 등을 만들었다.

참고문헌

『고려 이전 한국식생활사 연구』(이성우, 향문사,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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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이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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