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왕족으로 ‘여자진(餘自進)’이라고도 한다.
백제의 왕성인 사비성(泗沘城 :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이 660년(의자왕 20) 7월 나당연합군에 함락되자, 의자왕 이하 많은 귀족들과 주민들이 포로가 되었다. 이에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부흥운동이 은솔(恩率)복신(福信)의 주도하에 임사기산(任射岐山 : 지금의 충청남도 대흥)을 근거지로 전개되었다.
달솔(達率)인 그 역시 구마노리성(久麻怒利城 :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 혹은 도도기류산(都都岐留山 : 위치 미상)을 근거지로 하여 흩어진 병사들을 모았다. 병기가 없으므로 몽둥이로 싸워 신라군을 격파해 병기를 빼앗을 정도로 그가 이끈 백제부흥군이 강성해 당군(唐軍)도 감히 대적하지 못하였다. 사비성을 회복하자, 나라사람들이 복신과 함께 좌평(佐平)으로 일컬었다.
그러나 부흥군 지도층의 분란 등으로 인해 백제부흥운동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백제부흥군은 663년 가을 부흥군을 돕기 위해 파견된 왜병들과 함께 백촌강(白村江 : 동진강 하구, 또는 만경강 하구)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게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그 해 9월 24일 그는 달솔목소귀자(木素貴子), 곡나진수(谷那晋首), 억례복류(憶禮福留) 등과 함께 저례성(靔禮城 : 위치 미상)으로 후퇴했다가, 다음날 배를 타고 왜로 망명하였다.
669년에 좌평 귀실집사(鬼室集斯) 및 유민 7백여 명을 데리고 아후미노쿠니(近江國)의 가마후노고호리(蒲生郡)로 옮겨 거주하였다. 671년 1월 야마토조정(大和朝廷)으로부터 종4위하에 상당하는 대금하(大錦下)의 관등을 제수받았으며, 같은 백제유민인 사택소명(沙宅紹明)과 함께 법관대보(法官大輔)에 임명되었다. 그를 시조로 한 후예의 씨성(氏姓)은 다카노미야코(高野造)이다. 이들은 전문적인 수공업을 관장하는 집단의 수장으로서의 신분을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