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6대 강왕(康王)대에 활동하여,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된 795년경에는 광간대부공부낭중(匡諫大夫工部郎中)에 이르렀지만, 그 뒤의 행적이 불명하여 최종 관작은 알 수 없다.
그의 일행은 모두 68명으로서 795년에 발해를 출발하였으나, 11월에 에조족(蝦夷族 : 현재의 아이누족)이 살던 지역에 표착하여 인명과 물품의 피해를 당한 뒤, 일본조정의 조치로 에치고국[越後國]에 옮겨 머물렀다.
796년 4월 일본 수도에 들어가 강왕의 즉위를 알리는 국서와 함께, 그에 앞서 발해 문왕이 대흥(大興) 57년(793) 3월 4일에 사망한 사실을 알리는 국서를 각각 일본왕에게 전하고 발해에서 가져간 선물을 주었으며, 아울러 당나라에서 공부하고 있던 일본 승려 영충(永忠)이 발해를 통하여 일본에 보낸 편지를 전해주었다.
796년 5월 일행이 귀국하려 하자, 일본 조정은 미나가노히로다케[御長廣岳] 등으로 하여금 발해에 보내는 국서와 물품을 휴대하고 동행하도록 하였다. 이 국서에는 그가 가져갔던 발해의 국서가 전례에 어긋난다는 점을 지적하고, 아울러 발해의 국상을 위로한 내용이 실려 있었다. 아울러 영충에게 보내는 일본 태정관(太政官)의 글과 사금 300냥을 그에게 부탁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