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9월 16일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매룡리고분군은 여주시에서 동남쪽으로 3㎞쯤 떨어진 황학산(黃鶴山, 175.3m)의 산줄기가 북쪽으로 낮아지면서 매룡동을 지나 남한강변의 상동까지 이어져 있다. 고분군은 해발 80m 내외의 이 산줄기 능선과 여기서 동으로 뻗은 지맥들에 산재하고 있다. 일본인 금서룡(今西龍)이 1916년에 처음 상리(당시는 주내면 상리, 지금의 상동) 1·2호분을 조사 보고하였다. 1927년에는 매룡리 2·8호분의 실측도와 유물을 소개하였는데, 이 중 2호분은 1916년의 상리 1호분을 지명과 호수를 바꿔 소개한 것이다. 한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의하면 상리에는 봉토 직경 15m, 높이 5m의 고분 등 10여 기가, 매룡리(지금의 매룡동)에는 50여 기의 고분이 남아 있다고 하였다. 이후 1987·88년에는 한림대학교박물관에서 이 고분군의 가장 남쪽에 있는 매룡리 용강골 고분을 발굴하여, 삼국시대 돌방무덤(石室墓) 13기와 고려시대 움무덤(土壙墓) 2기를 조사하였다.
상리 고분은 현재 위치를 확인할 수 없으나, 남한강 남안의 영월루(迎月樓) 부근으로 추정되고 있다. 보고된 3기는 모두 옆으로 긴 횡장방형(橫長方形) 평면의 돌방무덤으로서, 널길(羨道)이 남쪽 긴벽의 중앙에 돌방보다 높게 단을 이루며 나 있다. 1호분의 돌방은 길이, 너비, 높이가 3.6×2.0×2.2m에 널길은 너비, 높이가 0.7×1.2m이며, 북·동·서 3벽을 내경하도록 쌓은 다음 편평한 천장석을 덮고 그 틈을 회로 막은 구조이다. 주검받침(屍床)이 동서 양쪽에 2개씩 있으며, 1호분에서 돌베게(石枕) 5개와 금동귀고리(金銅耳飾) 2점 그리고 손칼(刀子) 2점이, 8호분에서 돌베게 1개가 출토되었다.
용강골 고분군의 돌방무덤은 모두 장방형 평면에 경사면 아래쪽의 짧은 벽으로 널길이 나 있는 점에서 상리 돌방무덤들과는 다른 구조를 하고 있다. D-1·2호분에서 확인된 봉토의 직경은 1113m에 높이는 2m 가량되며, 대체로 지하로 약간 굴광하고 축조한 반지하식 구조이다. 돌방 크기는 가장 큰 A-1호분이 3.1×1.41.5×1.55m이며, 대체로 길이 23m에 너비 1.21.4m 정도이다. 대부분 깬돌(割石)을 이용하여 내경하도록 축조하고 천장에 큰 편평석 23매를 덮은 구조이나, B-1호분은 유일하게 말각조정(抹角藻井)천장을 하고 있어 주목된다. 널길은 E-1호분이 짧은 벽의 중앙에 있고 E-3호분도 이와 유사하나, 나머지는 널길이 오른쪽에 편재하여 있다. 이와 달리 널길이 돌방 바닥보다 0.5m 내외 높게 되어 있고, 바닥보다 2050㎝ 높은 주검받침이 12개씩 마련되어 있는 점은 상리의 것들과 통하는 구조이다. 널길의 크기는 너비가 0.41.0m에 길이가 0.7~1.0m 내외이다.
용강골 돌방무덤의 출토유물은 대부분 토기류이며, D-2호분에서 철손칼 1점이 출토되었다. 그밖에 돌베게가 D-2호에서 2점, B-1·E-2·E-3호분에서 각 1점이 출토되었다. 토기는 동체의 배가 둥글게 부르고 아가리가 짧게 외반된 작은항아리류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짧은굽다리접시, 병, 반, 보주형 꼭지의 뚜껑, 연질손잡이항아리 등이 있다. 이 중 D-2호분에서 출토된 병의 동체부에는 ‘정(井)’자가 음각되어 있기도 하다.
여주 지역은 백제 한성기에 술천성(述川城)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한성 함락(475년) 이후 고구려의 골내근현(骨乃斤縣)이 되었다가 신라 진흥왕의 한강유역 진출(552년) 이후 신라의 영역으로 편제되는 등 복잡한 정치적 변화를 겪은 지역으로 알려져 왔다. 이 때문에 매룡리 고분군은 그러한 변화를 보여줄 수 있는 주요한 예로서 많은 관심이 집중되어, 그 축조 주체에 대해 백제·고구려·신라고분설이 각기 대두되어 왔다.
상리와 용강골 석실묘는 평면형과 널길 위치에서는 차이가 있으나, 깬돌을 이용한 축조와 천장결구방식·단차가 있는 널길·높은 주검받침과 돌베게의 사용 등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으며, 이러한 구조는 경주 충효리 고분 등 주로 신라의 돌방무덤과 유사한 면이 있다. 한편 작은항아리와 병, 짧은굽다리접시 등의 토기류를 보면 신라의 특징적인 인화문토기(印花紋土器)는 없지만, 금산 장대리나 대전 주산동 고분군과 같이 6세기 중반 이후 신라 주변 지역의 돌방에서 출토되는 토기와 기종구성과 형태에서 동일하며, 고구려적인 요소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로 보아 매룡리 고분군의 축조 주체는 일단 6세기 중반 이후 신라계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다만 고구려 돌방무덤의 특징적인 말각조정천장을 하고 있는 B-2호분은 5세기대 이후 고구려문화의 영향을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