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난은 도결(都結: 田結에 다른 세목을 부가해 부과하는 것)의 문제로 발생했으나, 퇴임한 향리 윤보길(尹甫吉)의 오랜 부정에도 원인이 있었다. 때문에 민란에 참여한 농민은 윤보길의 15개 죄목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특히 이 민란의 배후 조종자로 전 현감 조병선(曺秉善)과 전 감역(監役) 박규호(朴奎浩)·한용덕(韓用德) 등이 지목되었는데, 조병선은 농상계(農桑契)의 계장이기도 하였다. 이 민란이 어느 정도 계획적인 양상을 보인 것은 바로 농상계의 조직을 중심으로 민란이 계획되었기 때문이다.
1884년 겨울에 이민상(李敏庠)·박규호·조병선·이병두(李秉斗)·곽승현(郭承鉉) 등이 연명해 통문을 돌려 민중을 선동하였다. 이 때 참여한 사람들은 농상계원으로 추정된다. 또 계장인 조병선의 집에서 모임을 가지기도 하였다.
농민들은 손에 몽둥이를 들고 관아에 돌입해 감옥을 파괴하고 죄수를 석방하였다. 또 향리의 집을 파괴하거나 향리를 살상하기도 하였다. 조정에서는 목사 김영덕(金永悳)을 문책, 파면하였다. 또 이태진(李泰鎭)을 새 목사로 파견하였다. 또 양주목사 윤성진(尹成鎭)을 안핵사로 파견해 사태를 수습하게 하였다.
그러나 안핵사 윤성진은 배후 조종자인 조병선을 조관(朝官)이라는 명목으로, 또 여타의 죄수에 대한 조사도 소홀히 했기 때문에 파면되었다. 그리하여 경기감사 박제관(朴齊寬)의 조사·보고에 따라 난의 주동자인 이병두·신필근(辛弼根) 등을 두 차례 엄형으로 다스린 뒤에 유배형에 처하였다. 그 밖의 많은 관련자들이 처벌되었다.
배후 조종자인 전현감 조병선과 전 감역 박규호·한용덕은 의금부에서 처벌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퇴리(退吏) 윤보길은 그의 동생이 난민들에 의해 살해된 것을 감안해 유배형에 처하는 데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