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연양동 유적 ( )

고대사
유적
경기도 여주시에 있는 삼국시대 토기 · 화덕자리 · 부뚜막 시설 관련 집터.
정의
경기도 여주시에 있는 삼국시대 토기 · 화덕자리 · 부뚜막 시설 관련 집터.
개설

남한강과 지류인 신진천(新津川)에 의해 형성된 강속의 섬(河中島)의 충적대지 상에 있다. 1995년 홍수 때 단애의 일부가 무너져 내리며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유적 주변에서 대규모 골재 채취작업과 토목 공사가 진행중이었기 때문에 유구의 훼손을 염려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1995년과 1997년 2차에 걸쳐 학술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굴조사에서는 원삼국시대 주거지 7기 및 방형유구(方形遺構) 1기, 제철관련 유구 2기를 비롯한 14기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주거지는 파괴가 심하여 전체적인 규모와 형태를 파악할 수 없는 편이나 평면형태상 장방형(長方形) 4기, 원형(圓形) 2기, 출입구가 달린 ‘철(凸)’자형 1기로 분류하였다. 그러나 장방형 주거지는 대체로 남쪽 단벽부가 교란되어 출입시설이 명확히 확인되지 않고, 특히 6호 주거지의 남쪽 교란부에서 많은 소토가 집중적으로 출토되었으며 단면 토층상에서 볼 때 남쪽부분의 어깨선으로 추정되는 지점에서부터 주거지의 바닥면이 비스듬히 경사져 올라와 출입시설, 혹은 ‘여(呂)’자형 주거지가 파괴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내용

발굴된 유적은 약 1,000여 평으로, 20cm의 표토층 아래는 사질토층으로 고려와 통일신라시대의 문화층이고, 그 아래층은 두께 20㎝ 내외가 초기 삼국시대의 문화층이다. 이 층에서 주거지 6기와 방형유구 1기 시대미상의 유구 2기 등 총 9기의 유구가 발굴 조사되었다. 그 중 2기의 주거지는 다음과 같다.

A지구 제2호 주거지는 장방형으로 면적 5.7m×4m, 깊이 5m이며, 장축은 강의 유향(流向)과 같은 북서-남동방향이다. 주거지 내에서는 2기의 화덕〔爐址〕이 발견되었다. 그 중 큰 것은 북측에 약간 치우쳐 있고, 타원형으로 토기조각과 냇돌을 점토를 섞어서 만들었다. 바닥은 토기조각과 냇돌을 깔고, 그 위를 점토로 덮고, 그 위에 다시 냇돌을 놓고 점토를 한 켜 더 덮는 식으로 형성하였다.

또 하나의 화덕은 큰 화덕의 남쪽에 위치한다. 점토와 토기편으로 만든 원형으로 바닥에서는 약간의 철제찌꺼기(slag)가 출토되었다. 이것은 제철(製鐵)과 연관이 있는 화덕으로 확인되었다.

A지구 제6호 주거지는 장방형으로 장축방향은 앞의 것과 같다. 크기는 면적 9.6m×7.6m, 깊이 25㎝이다. 주거지 내에는 숫과 탄 흙〔燒土〕이 섞인 사질토로 채워져 있는 점으로 보아 주거지는 화재로 인해 폐기된 것으로 판단되었다. 주거지의 밖에서 4개의 불규칙적인 기둥구멍이 발견되었다. 이 기둥구멍과 A지구 제7호 주거지 내의 숯이 방사상으로 남아 있는 점에서 주거지의 지붕형상은 청동기시대의 반수혈(半竪穴)과 같은 원추형으로 추정되었다.

B지구 제2호 주거지 내에서는 부뚜막시설이 발견되었다. 판석과 점토를 이용해 만들어졌으며, 아궁이〔火口〕에는 토기조각을 깔았고, 굴뚝은 점토를 사용해 원통형으로 하고 내부에는 긴 판상석을 세웠다.

주거지 내부시설로는 화덕자리(爐址)가 특징적인데 중부지방에서는 예가 드문 위석식노지(圍石式爐址) 1기와 냇돌(川石)을 깔고 점토를 덮은 부석식노지(敷石式爐址), 점토와 판석 또는 점토로 만든 부뚜막식노지 등이 확인되었다. 노지의 형식으로부터 기능을 추정컨대 부석식은 난방을 위한 시설로, 부뚜막시설은 취사를 주목적으로 설치한 것으로 보았다. 기타 벽체를 따라 일정한 깊이의 구(溝)를 파고 그 내부에 기둥을 박았던 벽체시설도 보고되었다.

주거지는 대부분 주민의 이주(移住) 후에 화재로 폐기된 것으로 추정되어 출토유물이 거의 없지만, 6호 주거지의 경우 거주하던 중 화재로 폐기되어 많은 유물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전체 주거지 안에서 출토된 토기는 99점으로 그 중 경질토기는 4점에 불과하고 대부분이 연질토기이다. 연질토기는 무문양토기와 타날문토기로 구분하였는데 무문양토기가 65점, 타날문토기가 28점 정도이며, 무문양토기는 외반구연호가, 타날문토기는 호(壺)가 대표적 기형으로 되어 있다. 발굴보고자는 주거지의 조성 연대를 부뚜막의 형식, 발달된 외반구연호, 경질토기의 증가 등으로 미루어 3세기 중반에서 4세기 초로 보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이 유적은 한강유역 지방에서 발굴 조사된 삼국시대 초기의 생활 유적으로서 하남 미사리의 밭과 주거지 유적 등과 함께 그 시대의 생활문화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한국고고학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02)
『여주 연양동유적』(국립중앙박물관, 1998)
「여주연양동유적발굴조사개보」(홍진근,『박물관신문』199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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