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 천호리 비로자나 석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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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연산 천호리 비로자나석불
연산 천호리 비로자나석불
조각
유물
국가유산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개태사지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조공양보살상.
이칭
이칭
개태사지 석조공양보살상
시도문화유산
지정 명칭
연산천호리비로자나석불(連山天護里毘盧舍那石佛)
분류
유물/불교조각/석조/불상
지정기관
충청남도
종목
충청남도 시도유형문화유산(1980년 10월 23일 지정)
소재지
충청남도 논산시 천호3길 64 (연산면) 용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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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개태사지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조공양보살상.
내용

연산 천호리 비로자나석불은 논산 개태사지 부근에 위치한 용화사의 법당에 봉안되어 있다. 개태사지에서 출토된 이 불상은 1980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그 명칭에 문제가 있다. 즉 이 불상은 비로자나불상이 아니라 공양보살상에 해당한다. 따라서 정확한 명칭은 ‘개태사지 석조공양보살상’이 되어야 한다.

개태사는 후삼국 통일을 기념하여 조성한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이 있는 개태사 구역과 이곳으로부터 북쪽으로 약 300m 떨어져 있는 개태사지로 나누어진다. 개태사에는 1963년 보물로 지정된 석조삼존불입상과 철확 등의 국가유산이 있으며 개태사지에서 옮겨온 오층석탑이 있다. 연산 천호리 비로자나석불로 잘못 명명된 개태사지 석조공양보살상은 개태사지에 있었던 오층석탑 앞에서 탑을 향해 공양하는 자세로 건립되었던 석조공양보살상이다. 개태사지 석조공양보살상은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있으며 두 손은 살짝 주먹을 쥔 채 가슴 앞에 모아 놓고 있다. 두부는 발견 당시 파손되어 있어 근래에 다시 만든 것이다. 이 석조공양보살상의 오른손은 주먹을 쥔 채 새끼손가락만을 핀 상태로 왼손을 받치고 있다. 왼손의 상면에는 원형의 홈이 파여져 있어 지물을 꽂았던 흔적임을 알 수 있다. 허리띠와 다리 사이를 가로지르는 끈이 복부에서 화문형 매듭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는 개태사 석조삼존불 중 우협시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개태사지 석조공양상보살은 그동안 구체적인 분석 없이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과 동일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져 왔는데 그 조성 시기는 개태사지 발굴 조사의 성과를 통해서 살필 수 있다. 현재의 개태사로부터 300m 가까이 떨어져 있는 개태사지는 크게 불전지와 진전지, 출입시설로 구분된다. 개태사지의 불전지와 진전지는 출입지역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나누어진다. 주 출입구가 진전지와 불전지 사이에 위치해 있는 점으로 보아 진전지와 불전지는 동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개태사 석조공양보살상의 조성 시기는 개태사지에 조성된 태조 진전사원의 건립 시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편, 개태사지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된 유물 중 조성 시기가 가장 이른 것은 충주 숭선사지 초창기 수막새와 매우 유사한 꽃술대가 있는 수막새이다. 숭선사는 광종이 모후(母后)인 충주 유씨 신명순성태후(神明順成太后)의 명복을 빌기 위해 954년(광종 5)에 창건한 사찰이다. 숭선사의 창건기 막새는 개경 만월대를 비롯해 고려 전기의 중요 사찰인 흥덕사지, 봉업사지 등에서도 출토되었다. 결국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찰을 건립하거나 중건할 경우 중앙 정부에서 전문적인 장인을 파견해 지원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개태사지 불전지와 진전지의 건립시기는 숭선사지 창건기 기와 제작 시기와 같은 954년경으로 설정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탑은 가람의 건립과 동시에 계획되고 조성되는데,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개태사 석조공양보살상은 개태사지 진전사원의 창건과 함께 제작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개태사 석조공양보살상의 형식적 특징은 10세기 중반기에 조성된 다른 불상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석조공양보살상에서 확인되는 다리 사이의 두꺼운 끈 모양은 960년대 전반에 조성된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의 다리 사이 돋을 띠 문양에 형식적인 영향을 주었다. 개태사지 석조공양보살상과 같은 고려시대에 제작된 탑전 석조공양보살상은 개태사지 이외에 강릉 신복사지, 원주 법천사지, 평창 월정사에도 존재한다. 기존에는 이러한 탑전 석조공양보살상은 명주(강릉) 지역의 지방적 특징이며 개태사 석조공양보살상의 경우는 명주 지역의 문화가 논산에 영향을 준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성과를 통해서 개태사 석조공양보살상이 공양보살상 중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이 밝혀졌다. 결국 개태사지 석조공양보살상이 11세기 이후 강원도 지역에서 조성된 석조공양보살상에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영향관계가 성립할 수 있었던 이유는 태봉 때부터 중앙에서 활동했던 장인들이 주로 명주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이들 명주 출신 장인집단은 태봉에 이어 고려에서도 중앙에서 활약하며 국가나 왕실이 지원하는 사찰과 불상 조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개태사지 석조공양보살상은 이들 명주 장인들에 의해 광종 때 태조의 진전이 개태사에 조성되면서 함께 제작된 불상이다. 중앙에서 활약한 명주 출신 장인들이 다시 지방으로 돌아간 이유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광종대 이후 경종대부터 목종대까지 승탑이나 탑비 등의 조성 사업이 소원해 지면서 중앙정부 차원에서 요구되는 석장들의 수요가 급격히 감소한 것이 한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참고문헌

『태봉과 고려: 석조미술로 보는 역사』(정성권, 학연문화사, 2015)
『개태사Ⅰ』(충남대학교 박물관, 1993)
「고려시대 탑전 석조공양보살상의 등장과 전개」(정성권, 『불교미술사학』21, 2016)
「논산 개태사 석조공양상 연구」(정성권, 『불교미술』23,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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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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