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 6책. 필사본.
이 책은 저자가 1832년에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정사 서경보(徐耕輔), 부사 윤치겸(尹致謙)과 같이 청나라에 다녀오면서 6월 말부터 이듬해 4월초까지 9개월여 간을 기록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어느 연행록보다 방대한 분량으로 되어 있다.
권1·2는 「출강록 出疆錄」으로 북경(北京)의 관소에 도착하기까지 일기와 기(記)를 수록하였다. 권3∼권5는 관소에서 머물 때의 기록인 「유관록 留館錄」 상·중·하이다. 권3의 「유관록」 상은 1832년 12월까지의 기록, 권4의 「유관록」 중은 1833년 1월까지의 기록, 권5의 「유관록」 하는 북경을 출발해 귀국하기까지의 기록이다.
권6은 「유관별록 留館別錄」으로 되어 있다. 「유관별록」은 저자의 주에 “한 곳에다 기록할 수 없는 견문을 분류해 기록하였다.”라고 했듯이 한 항목에 들어갈 수 없는 것만을 별도로 작성한 것이다. 중국의 지리·문물·제도·풍속 등속에서 그 기본이 되는 것만을 골라 간략하게 서술하였다.
저자는 서문에서 『연행일기』는 월·일로 구분한 편년체로 되어 있고, 홍대용(洪大容)의 『연기(燕記)』는 사건별로 전말을 기록한 기사체이며,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자기의 뜻에 따라 입론(立論)한 입전체(立傳體)라고 파악하였다. 그리고서 자신의 책은 이 세 가지를 본받고 당시의 기록과 다른 것은 별도로 기록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저자가 밝힌 바와 마찬가지로 일기 형식과 기사체를 병용했고 간간이 자기의 입론을 제시하였다. 그 기록 가운데는 이 위의 세 책을 인용하기도 하고 별도로 적어 넣기도 하였다.
그리고 사행과 별로 관계가 없는 가사(家事)나 하찮은 일은 간주(間註)로 처리하였다. 또, 기사체(이 책은 거의 대부분이 記로 표시되었음.)의 내용은 주로 직접 보고 들은 것이지만, 간혹 전해들은 것이면 전해 준 사람의 이름까지 명기하였다. 입론을 적을 때 인용문에 결자(缺字)가 있으면 결자 표시를, 어려운 용어에는 간단한 풀이를, 필요한 것에는 내용에 대한 별주(別註)를 달기도 하였다.
수록된 기문(記文)은 권1에 「구룡정기(九龍亭記)」·「압록강기(鴨綠江記)」·「책문기(柵門記)」·「영길리국표선기(英吉利國漂船記)」·「고려총기(高麗叢記)」 등 42편, 권2에 「심양세폐기(瀋陽歲幣記)」·「수양산기(首陽山記)」·「고려보기(高麗堡記)」 등 58편, 권3에 「북경풍수(北京風水)」·「가방위치(街坊位置)」·「연경팔경(燕京八景)」·「시헌국기(時憲局記)」·「서천주당기(西天主堂記)」 등 23편을 수록하였다.
이어 권4에 「당자기(堂子記)」·「태양궁기(太陽宮記)」·「국자감기(國子監記)」 등 50편, 권5에 「지안문외관묘기(地安門外關廟記)」·「이마두묘기(利瑪竇墓記)」·「역대제왕묘기(歷代帝王廟記)」·「광녕성기(廣寧城記)」·「안시성기(安市城記)」 등 57편으로 총 230편이다.
당시 조선과 청나라는 어려운 위기를 맞기 시작하였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물결은 조선에도 번져 1797년(정조 21) 영국의 북태평양 탐험선이 용당포(龍塘浦)에 온 이후, 이 사행이 있기 직전 영국 상선이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였다.
또 임진왜란 후 민간에 전파되었던 천주교는 이승훈(李承薰)과 청나라 신부 주문모(周文謨)에 의해 많은 세력을 뻗치고 있었다. 한편, 청나라에서는 영국이 차·아편 등을 가지고 청나라를 잠식하는 한편, 자국의 화폐를 통용하게 하여 청나라의 경제 질서를 문란시켰다.
따라서 이 책은 오직 청나라를 통한 문화 교류만을 생각한 당시 사대부들에게 있어서는 어느 때보다 주요한 지침서였을 것이다. 또한 당시 국내 문제를 보고하고 거기에 대처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데 있어서 사행 또한 그 임무가 더욱 중요하였을 것이다.
이 책의 특이한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영국 상선이 조선에 대해 통상을 요구한 전말로 영국 선박에 관한 기록, 영국인의 편지와 지도 등 예물 목록 등이 자세하다. 둘째는 표류한 유구(琉球) 사람의 송환과 유구로 표류한 우리나라 사람의 입송 전말로 유구의 위치·풍속·제도 및 중국 남쪽 섬 지방의 풍물 등이 소개되어 있다.
셋째는 청국내의 아편에 관한 정책 전말로 당시 아편에 대한 청나라 관원들의 대처 방안을 『당보(塘報)』에 실려 있는 것을 중심으로 엮었다. 넷째는 러시아의 그리스정교에 관한 것으로 러시아의 정교가 천주교와 다른 점과 러시아인의 신문물을 소개하였다.
조선의 사행이 천주교나 서구 문물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러시아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했던 점에 비추어 희귀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