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비단 바탕에 수묵담채로 그렸고, 크기는 세로 94㎝, 가로 59㎝이다.
본래는 상단(上段)의 표제(標題), 중단의 그림, 하단의 좌목(座目 : 서열을 적은 목록)이 갖추어져 있었을 것이나 현재는 중단의 그림 부분만 남아 있고 제목 부분과 참석자들의 성명, 관직 등을 적은 좌목 부분이 잘려 나간 채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계회의 구체적인 내용과 참석자들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이 조선 초기부터 유행하였던 문인들의 계회를 묘사한 것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계회가 열리고 있는 정자 앞에 연못이 있음을 고려하여 ‘연정계회도(蓮亭契會圖)’라고 부른다.
화가도 알려져 있지 않으나 관례로 보아 도화서(圖畵署)에 소속되어 있던 화원(畵員)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마찬가지로 제작연대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동일한 화가에 의한 작품임이 분명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호조낭관계회도(戶曹郎官契會圖)」가 1542년경에 제작된 것을 고려할 때 그보다 좀 더 숙달된 솜씨를 보여 주는 이 작품은 1550년대에 그려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 그림은 계회가 건물 안에서 열리고 있고, 계회 장면이 배경의 산수와 거의 대등하게 중요시되어 있다. 이는 계회 장면을 압도적인 산수 배경 속에 상징적으로만 표현하던 16세기 전반기까지의 계회도와 대조적인 특징이다. 또한 조선 초기의 계회도들은 예외 없이 안견파(安堅派) 화풍을 구사하여 그려졌다. 그와 달리 이 계회도는 안견파 화풍의 잔재를 보여 주면서도 새로운 경향을 동시에 드러낸다.
이처럼 이 계회도는 「호조낭관계회도」와 마찬가지로 16세기 중엽에 이루어지고 있던 계회도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계회가 열리고 있는 정자의 내부에 7명의 참석자들이 원을 그리며 앉아 있고, 그 오른편에 5명의 여인들이 열 지어 앉아 있다. 계원들의 자세는 편안하고 자유스러워 보이고 화기 넘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위계가 뚜렷한 관아(官衙)의 계회라기보다는 동년배끼리의 모임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계원들은 앞에 음식상을 받아 놓고 있다. 근경의 연못, 중경의 연운과 그것으로부터 솟아오른 지붕들과 대밭, 후경의 나지막한 산들이 계회가 열리고 있는 건물과 잘 조화되어 있으며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연못 주변의 버드나무들은 남송대(南宋代) 원체화풍(院體畵風)을 드러내고 있어서 안견파 화풍과의 차이점을 보여준다.
요컨대 이 계회도는 조선 초기의 계회도와 중기의 계회도를 잇는 과도기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중기에는 계회도가 산수 배경보다는 계회 장면을 중시하고, 안견파 화풍보다는 절파계(浙派系) 화풍으로 그려지는 것이 상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