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에 들어 일제는 산미증식계획을 수립했는데, 수리조합의 증설은 그 핵심적 내용이었다.
그러나 수리조합비의 과다징수 등으로 인해 각처에서 수리조합 반대운동이 일어났으며, 연백과 해주도 그 중 하나이다. 발단은 1920년대 초, 선만개척주식회사(鮮滿開拓株式會社)가 중심이 되어 연백군과 해주군 2개군에 걸친 대수리조합을 만들려고 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1922년 9월, 이 지역의 중소지주들은 대표를 뽑아 총독에게 조합설치 반대탄원서를 제출하였다. 탄원서 제출은 계속되어, 1923년 6월 총독에게 제출된 진정서에는 1,500명이 연명으로 날인하였다.
지주들의 반대에 직면한 선만개척주식회사측이 1924년 설치찬성 청원서를 허위작성한 것이 밝혀지면서 농민들로부터 더욱 분노를 샀다. 1924년 8월에는 선만개척주식회사가 만든 기존 수리시설 때문에 상류지방의 500정보가 홍수를 입어 전혀 수확하지 못하였다.
이 때 피해 지주들이 대표 16명을 뽑아 황해도청에 선만개척회사에 대한 소송을 제기하여 수리조합농민운동은 다양하게 전개되어갔다. 1925년에도 조합설립 반대운동은 계속되었다.
1,300여 명의 중소지주들이 수리조합에 의한 저수지의 지형이 낮아 전혀 이용할 수도 없다면서 대표 3명을 뽑아 총독부에 진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1월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연해수리조합은 설치되었다. 이후에는 별다른 반대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 운동은 총독부에 대한 탄원서 제출 및 소송제기 형태로 전개되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으나, 일본제국주의의 중심적 농업정책을 반대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