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자의 호를 따서 ‘노가재연행록(老稼齋燕行錄)’이라고도 한다. 9권 6책. 필사본.
저자가 동지 겸 사은정사(冬至兼謝恩正使) 김창집(金昌集)의 군관으로 부사(副使) 윤지인(尹趾仁), 서장관(書狀官) 노세하(盧世夏)와 함께 청나라에 다녀오면서 1712년(숙종 38) 11월 3일부터 이듬해 3월 30일까지 5개월 동안의 일기를 기록한 것이다. 표지명은 ‘老稼齋燕行錄(노가재연행록)’이다.
체재는 권두의 별록(別錄)과 일기로 구분된다. 별록에는 일행의 인마(人馬) 수, 방물(方物)·세폐(歲幣) 목록, 예단(禮單 : 세폐의 품목 명세서)과 인정(人情), 입경(入京)해 하정(下程 : 사신에게 일상 수요 물품을 내림)하는 예식, 표문(表文 : 감회를 진술해 왕에게 올리는 글)·자문(咨文 : 중국과 주고받던 문서)을 바치는 예식, 중국 조회에 참여하는 예식, 가지고 오는 물목(物目), 상마연(上馬宴), 산천·풍속, 오갈 때 경치의 총록 등이 실려 있다.
산천·풍속에 대한 기록은 내용이나 양에서 가장 비중이 크다. 일기 가운데서 중요한 부분만 요약한 것으로 청나라의 진기한 풍속, 한인과 청인의 차이, 청 지배 하에서 한인의 제도 변화와 청인의 변모 등이 주요 내용이다.
일기는 모두 5권이다. 권1은 영원위(寧遠衛)에서 북경에 도착하기까지, 권2는 신년 조하(朝賀)를 하는 일로부터 북경 유람까지, 권3은 사행을 마치고 북경을 떠나기까지, 권4는 북경을 떠나 돌아오는 길에 따로 의무려산(醫巫閭山) 유람길에 오르기까지, 권5는 의무려산과 천산(千山)을 유람하고 다시 일행과 합류해 의주를 거쳐 서울로 돌아오기까지의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사행의 목적은 조·청 간에 이뤄진 네 가지 일에 대한 사은과 정례적인 동지사를 겸한 것이었다. 1644년(인조 22) 이후부터 1년에 네 차례 보내던 정기 사행을 단일화해 삼절 겸 연공사(三節兼年貢使 : 일명 節使)라 하여 동지에 보내도록 했는데, 바로 이 사행부터이다.
네 가지 사은이란 1712년 국경을 확정한 백두산정계비의 건립, 예단을 줄여 방물로 바꾸도록 한 일, 금의 세공(歲貢)을 없애고 표피(豹皮)를 줄인 일, 국경을 넘어 청에 들어간 조선인에 대한 조사를 면제한 데 대한 것이었다.
저자는 55세의 적지 않은 나이로 주위 사람의 만류도 뿌리치고 사행에 동행했는데, 평소 저자가 청의 문화를 접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일기에는 저자가 일찍이 본 연행록을 인용하거나 그와 다른 점을 소개하면서, 많은 지역을 홀로 여행하면서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하였다.
내용이나 문체·짜임새에서 홍대용(洪大容)의 ≪담헌일기 湛軒日記≫,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 熱河日記≫, 김경선(金景善)의 ≪연원직지 燕轅直指≫와 더불어 연행록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가 맡은 임무는 타각(打角)이었다. 타각은 원래 사신 행차의 모든 기구를 감수하는 책임을 맡았으나, 자벽군관(自辟軍官) 또는 자제군관(子弟軍官)이라 하여 정사나 부사가 자제나 친지를 뽑아 정부의 승인을 얻어 수행하는 것으로, 특별한 임무를 가진 것이 아니라 견문을 넓히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자유로이 여행하며 폭 넓은 기록을 할 수 있었으며, 홍대용·박지원 등의 연행기록은 그 대표적 예이다. 기록에 이따금 할주를 달아 명나라 때의 통례를 적어 청과 다른 점을 드러냈다. 이로써 오랑캐로 변해 가는 중국을 시종일관 낮춰 보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또한 이 책은 숭명배청에서 북학파(北學派)사상으로 이어지는 시기를 대표한다. 그리하여 당시 강희(康熙)의 치세로 융성해 가는 중국 사회나 사상의 변화를 보는 대로 씀으로써 문학작품 뿐 아니라 중국 관련 사료로서도 가치가 높다. 이 사신 행차의 다른 기록으로 최덕중(崔德中)의 ≪연행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