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때는 하곡현(河曲縣), 고려 때는 지울주군사(知蔚州郡事), 조선시대에는 울산군(蔚山郡)의 관할 하에 있었으며, 진(鎭)이 설치되어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울산군 방어진읍 염포리로 되었다가, 1962년 울산시 염포동으로 편입되었다.
지명 유래는 예로부터 소금밭이 많아 ‘소금나는 갯가’라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지형상으로는 서북쪽에 하안평야가 있을 뿐 갯가와 산지로 둘러싸여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염포진(鹽浦鎭)이 있어 수군만호가 주둔하였다. 문헌상에는 이곳에 성이 있어 둘레가 1,039척이 되고 성내에는 우물이 3개 있다고 하였다.
1426년(세종 8) 부산포(富山浦)ㆍ제포(薺浦)와 함께 삼포에 왜관(倭館)을 설치할 때 염포에도 일본인의 거주가 허락되었다. 삼포의 왜관 규모는 신숙주(申叔舟)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 의하면 36호 120명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에 왜국 사절이 서울을 갈 때 염포에 상륙하여 언양ㆍ경주ㆍ안동을 거쳐 가도록 정하여, 염포는 좌로(左路)의 시발지가 되었다.
삼포의 개항 당시 염포의 왜인의 수를 60명으로 한정하였는데, 1510년(중종 5) 삼포왜란이 일어날 당시에는 120여 명이 상주하였다. 1512년 임신약조의 체결로 염포의 왜관은 폐쇄되었다.
염포는 역사적으로 울산 지역을 방어하는 군사기지로서 큰 몫을 하였다. 태화강(太和江) 하구에 위치하여 개운포(開運浦)ㆍ유포(柳浦)와 함께 울산의 좌병영을 지키는 수군의 군사기지였다.
조선시대에는 부근에 가리산(加里山)ㆍ천내산(川內山) 봉수가 있었으며, 동쪽 해안 지대에는 목장이 있었다. 염포 대안에는 처용암(處容巖)이 있는데 신라 때의 「처용가」 전설이 전하는 곳이다. 오늘날에도 어부들은 이 바위에서 용제(龍祭)를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