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사신의 접대업무를 관장하였다. 설치연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직관지의 “영객부는 본래 이름은 왜전(倭典)이었는데, 진평왕 43년(621)에 영객전(領客典)으로 고쳤다.”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 진평왕 13년(591)조의 “영객부령(領客府令) 2인을 두었다.”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기록의 상이성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즉, 591년에 중국사신의 접대를 위해 영객부를 설치하였고, 621년에는 그 전에 왜사(倭使)를 접대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왜전(설치연대는 미상)을 영객전으로 개칭하였다는 것이다.
이 두 기관은 651년(진덕여왕 5) 영객전이 영객부에 통합되면서 단일관부로서의 영객부가 설치되어 외빈접대업무를 총괄하게 되었다. 그리고 경덕왕의 관제개편 때 사빈부(司賓府)로 개칭되었다가, 혜공왕 때 다시 영객부로 복구되었다.
소속관으로는 장관인 영(令), 차관인 경(卿), 대사(大舍), 사지(舍知), 사(史)가 있었다. 이 중 영은 591년에 설치되었으며, 대아찬(大阿飡)에서 각간(角干)의 관등에 있는 자가 임명되었으며, 진골출신만의 관직으로서 정원은 2인이다. 경은 설치연대는 미상이며, 급찬(級飡)에서 아찬의 관등에 있는 자가 임명되었고, 정원은 1인이었으나 675년(문무왕 15) 1인이 증원되어 2인이 되었다.
대사는 설치연대는 미상이나 759년(경덕왕 18) 주부(主簿)로 개칭되었다가, 혜공왕 때 다시 대사로 환원되었다. 사지에서 나마(奈麻)의 관등에 있는 자가 임명되었고 정원은 2인이었다. 또 사지는 설치연대는 미상이나 759년에 사의(司儀)로 개칭되었다가, 혜공왕 때 다시 사지로 환원되었다. 사지에서 대사의 관등에 있는 자가 임명되었고 정원은 1인이었다. 사는 설치연대는 미상이며, 정원은 8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