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확인된 고구려 연호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으로서, 광개토대왕시대의 중국과 대등한 입장을 과시한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天下觀)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아울러 고구려 왕권의 강화를 뜻하기도 한다.
그런데 영락 연호는 다른 고구려 연호와 마찬가지로 사서에는 보이지 않고 금석문에서만 확인된다. 즉, 만주 집안현(輯安縣)에 있는 광개토왕릉비문과 평안남도 대안시 덕흥리에서 발굴된 고분 벽면에 남아 있는 유주자사(幽州刺史) 진(鎭)의 묵서명(墨書銘)에 보이고 있다.
그런데 광개토왕릉비문과 유주자사 진의 묵서명에 적힌 영락 연호에 의한 기년(紀年)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기재된 광개토왕의 즉위년과 1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광개토왕의 즉위년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392년 임진년이지만, 광개토왕릉비문에 의하면 영락 5년은 을미년이므로, 영락 1년은 391년, 즉 신묘년이 된다.
이 경우 당대의 금석문인 광개토왕릉비문의 기년(紀年)이 옳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