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랑(述郎)·남랑(南郎)·안상(安詳) 등과 더불어 이른바 사선(四仙)의 하나로 꼽혔으며, 금강산 방면의 여행과 놀이로 이름났다.
그의 족적은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 문인들 사이에 회자되어 ‘영랑도남석행(永郎徒南石行)’이라 바위에 새겨진 삼일포(三日浦 : 지금의 강원도 고성군) 방면을 답사, 기행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금강산에는 실제로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 ‘영랑재[永郎峴]’가 있었다고 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그의 낭도 가운데는 진재(眞才)·번완(繁完) 등이 특히 유명하였다고 한다.
최근 학계에 알려진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서석(書石)의 명문에 ‘술년 6월 2일 영랑 성업(戌年六月二日永郎成業)’이라 한 것이 보이고 있어, 그가 화랑으로서의 수련기간을 마친 것을 기념한 각문(刻文)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이 영랑이 바로 효소왕 때의 영랑 일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