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학당은 동학당(東學黨)의 잔여 세력들이 1898년 전라도 지역에서 ‘동학’ 대신 ‘영학’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재건한 조직이다.
이들이 ‘영학’이란 명칭을 쓴 것은 그들이 신봉하는 종교가 영학, 즉 영국의 종교인 것처럼 위장하여 정부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 같은 위장을 위해 한때 영국인 선교사를 초빙하여 설교집회를 가지기도 하였다.
1898년 당시 영학당의 수계장(首稧長)은 정읍의 최일서(崔一西)였다. 이들은 당시 전라도의 고부·흥덕·고창·장성·영광·무장·함평 등지에 조직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1898년 가을부터 미곡 수출에 반대하는 등 현실 문제에 관심을 표명하고 있었다.
영학당의 조직 가운데 가장 먼저 봉기한 것은 흥덕(興德)의 영학당이었다. 흥덕의 영학당 두령 이화삼(李化三)은 1898년 12월 300여 명의 농민들을 이끌고 관아에 들어가 민회(民會) 형식으로 농민들의 의사를 모아 군수를 내쫓았다.
이 민회에서 흥덕군수의 무미(貿米)·세전독징(稅錢督徵) 등 탐학상이 지적된 것으로 보아, 흥덕에서의 영학당 봉기는 흥덕군수의 탐학에 그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봉기는 사흘 뒤 광주(光州)에서 파견된 관군에 의해 진압되고 이화삼 등은 체포되었다. 이화삼이 붙잡힌 뒤 영학당에서는 1899년 5월 4일흥덕군에서 호남공동대회(湖南共同大會)를 열고 이화삼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화삼은 석방되지 않고, 5월 27일광주로 극비리에 이송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된 영학당 등 농민 400여 명은 그날 밤 고부에서 봉기하여 고부군아를 점령하고 무기를 탈취한 다음, 자신들이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왜양(斥倭洋)’을 위하여 봉기하였음을 방문을 통하여 천명하였다.
이들은 이어 흥덕·무장의 군아를 습격, 점령하였다. 이때 고부의 김문행(金文行)과 정읍의 최익서(崔益瑞)가 봉기를 지휘하였다.
이들은 고창을 거쳐 영암의 민란을 지원한 다음, 곧 광주·전주를 거쳐 서울로 쳐들어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5월 31일 고창군아 공격에서 영학당군은 관군에 패퇴, 해산되고 말았다.
이로써 영학당의 봉기는 일단 진압되었으나, 관군은 영학당의 재기를 염려하여 고부·태인·정읍·부안 등지에 210명의 군대를 주둔시켰다.
이들 영학당이 동학당의 잔여 세력이라는 사실은 5월의 봉기를 지휘한 최익서가 “우리 당은 모두 갑오년의 여괴(餘魁)·누도(漏徒)로서 이번에 봉기하였다.”고 말한 데서도 잘 나타나 있다. 또, 그들이 내건 ‘보국안민’·‘척왜양’도 동학당의 그것과 같았다.
이 영학당의 봉기를 보도한 당시의 『황성신문』은 한발 등으로 농민들의 빈궁이 가속화되고, 그 위에 가해진 지방관들의 탐학이 농민들의 봉기를 부추겼다고 진단하면서, 그와 같은 상황은 다른 지방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하였다.
영학당의 봉기는 1894년의 동학농민군 봉기를 계승한 농민들의 반침략·반봉건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