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음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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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
개념
영화를 위하여 작곡 · 편곡 · 선곡한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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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영화를 위하여 작곡 · 편곡 · 선곡한 음악.
내용

1918년 서울 종로3가에 있는 단성사 (團成社)가 영화상설관(무성영화)으로 개편되면서, 이왕직양악대(李王職洋樂隊) 출신인 악단원들이 중심이 되어 스크린뮤직밴드가 생겨났다. 1932년 이전까지 수입되던 무성영화에는 영화의 장면을 위한 분위기 음악악보가 따라왔다.

애정 장면을 표현하는 로맨스 1번·2번, 이별의 슬픔 또는 죽음을 암시하는 엘레지(悲歌) 1번·2번,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장면을 위하여 폭풍 1번·2번 등 대개는 구미(歐美)의 기성음악을 일관 편성한 오케스트라용 악본이었다. 이런 음악 중에서 슈만 작곡의 「트로이메라이」, 마스네 작곡의 「엘레지」, 바흐 작곡의 「G선상의 아리아」, 생상스 작곡의 「백조」, 오펜바흐 작곡의 「천국과 지옥」, 로시니 작곡의 「윌리엄 텔 서곡」 등에서 발췌한 곡들이 영화관을 통하여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명곡들이었다.

1935년 이후 본격적으로 발성영화시대가 되면서, 영화관의 악단원들은 순회극단·가극단·레코드사 연주단원으로 변신하였다. 이런 연주인들 중에서 대중가요 작곡가들이 많이 생겨났다. 전수린(全壽麟)·문호월(文湖月)·김교성(金敎聲)·박시춘(朴是春)·전기현(全基鉉)·김화영(金華榮) 등이 이런 맥락을 이어온 인물들이다.

1935년 영화 「춘향전」은 최초의 발성영화로 녹음기사 이필우(李弼雨)의 솜씨였으나, 극중 대사만 발성이었다. 이창근(李昌根) 감독이 평양에서 「처의 모습」이라는 극영화에 조두남(趙斗南) 작곡으로 창작음악을 썼다는 기록이 있다.

1940년 방한준(方漢駿) 감독이 국책문화영화인 「풍년송」에서 우리 민요를 편곡, 안기영(安基永)이 지휘, 녹음하였다. 1941년 이병일(李炳逸) 감독 「반도의 봄」은 태평레코드사와 신흥악극단이 참여한 기록영화적인 작품이었다. 8·15광복 이후부터 6·25전쟁까지 기록영화·문화영화·극영화의 총 제작수는 69편이다.

이들 영화의 음악은 대개 기성 레코드음악으로 화면을 채우는 것이 고작이었다. 1946년도 최인규(崔寅奎) 감독 「자유만세」(음악담당 박태현(朴泰鉉)), 1947년도 「죄 없는 죄인」(음악담당 임원식(林元植))도 레코드음악이었다. 레코드에 의한 기성음악 선곡은 조백봉(趙白峰), 본명 조갑순 (趙甲淳))이 주로 하였다. 영화 「흥부전」(이경선 감독)에서 소편성의 관현악단을 동원하여 김성태(金聖泰)가 광복 후 처음 영화음악을 작곡하였다.

1949년 음악영화 「푸른 언덕」에서 본격적으로 서울교향악단(김생려(金生麗)가 조직한 서울 시립교향악단의 전신) 50여 명을 동원하여 전편에 걸쳐 황문평(黃文平) 작곡의 창작음악을 사용하였다. 1948년 신경균(申敬均) 감독 「새로운 맹세」의 음악담당 박시춘이 경음악단을 동원하여 창작곡으로 전편을 담당하였다.

1954년 국산영화 진흥을 위한 법적 조처로 입장세가 면세되면서 영화제작이 활기를 띠어 수적으로 많은 극영화가 제작되자 많은 작곡가들이 영화음악 창작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출격명령」(홍성기(洪性麒) 감독)에서 베를린대학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안병소(安炳昭)가 음악을 담당하였고, 신상옥(申相玉) 감독 「무영탑」은 나운영(羅運榮)이 작곡하였다. 이른바 차원이 높은 문예작품이라는 극영화 제작진들의 통념으로, 영화음악 창작은 순수음악 분야의 작가들에게 위촉하는 것이 이 당시의 상례였다.

6·25전쟁 이후 월남한 김동진(金東振)·김대현(金大賢)을 비롯하여 김성태·정회갑(鄭回甲)·정윤주(鄭潤柱) 등이 많은 작품을 썼다. 1957년 「청춘극장」(홍성기 감독)의 음악담당자 김동진은 대중성을 고려하여 대중가요 가수 남일해(南一海)와 송민도에게 「축배의 노래」라는 주제가를 부르게 하였다.

1956년 「백치 아다다」(이강천(李康天) 감독)에서는 여주인공 나애심(羅愛心)에게 「백치 아다다」라는 주제가를 부르게 하였다. 신상옥 감독 「동심초(同心草)」의 음악 담당 김성태는 가곡 「동심초」를 대중가요 가수 권혜경(權惠卿)에게 부르게 하였다. 군악대 출신 작곡가 한상기(韓相基. 해병대 군악대장 출신)·김희조(金熙祚. 육군 군악대장 출신)·전정근(田正根. 공군 군악대 출신) 등이 개성 있는 음악성을 발휘하여 영화음악의 전문가로 활약하였다.

가요작곡가로 오랜 경력을 지닌 박시춘은 영화음악 담당에서 진일보하여 오향영화사(五響映畵社)를 창립, 극영화의 제작·감독까지 직접 하였다. 가요작곡가 손목인(孫牧人)·이인권(李寅權)도 많은 멜로드라마 작품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제작비 절감 또는 속성제작 등의 폐습이 만연하여 레코드음악으로 때우는 경우도 많아, 전체 제작편수 중에서 창작음악으로 작품이 완성되는 비율은 50%를 조금 넘는 형편이었다.

또 여러 장르의 음악을 포용하는 하나의 새로운 음악매체로 그 특수성과 한국영화음악의 발전과 레코드음악(기성음악)을 추방한다는 목표 아래 한국영화음악작곡가협회가 조직되었다. 초대 회장에 김성태, 부회장에 김대현(순수분야), 손목인(대중분야), 그리고 이사진에 김동진·한상기·박시춘, 사무국장에 황문평이었다.

1962년 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가 조직되어 각 분야마다 유사한 장르별로 협회를 구성하도록 한 정부방침에 따라 영화음악협회는 한국영화인협회(韓國映畵人協會) 산하로 규합되었다. 1961년 당시 인기가수 한명숙(韓明淑)이 부른 「노란 샤쓰의 사나이」가 영화로 제작되면서 영화 제목 값으로 작곡가 손석우(孫夕友)에게 100만 환을 지불하는 신기록을 세웠다.

노필 감독의 「꿈은 사라지고」에서는 남주인공 최무룡(崔戊龍)이 주제가를, 여주인공 문정숙(文貞淑)이 「나는 가야지」 등을 불러 노래하는 스타로 부상하였다. 연기파 배우 김승호(金勝鎬) 역시 「아무리 옷이 날개라지만」에서 직접 주제가를 불러 인기가 높았다. 영화주제가의 붐이 일자 당시 최고 인기가수였던 나훈아(羅勳兒)·남진(南珍) 등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 대중음악이 영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다.

청춘스타로 최고의 인기를 받고 있던 신성일(申星一)·엄앵란 공연의 청춘영화 「맨발의 청춘」에서는 이봉조(李鳳祚)가 주제가를 만들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뮤지컬작가 최창권(崔彰權)이 주목받는 영화음악을 창작하였다.

영화음악은 우선 담당감독의 이미지에 부합되는 영화적인 감성이 초점이었다. 그래서인지 감독의 영상세계에 있어서 표출방법을 고집하는 개성에 따라 감독과 콤비가 되어야 한다. 그 예로 65편의 작품을 남긴 신상옥의 경우 정윤주가 제일 많은 작품을 썼다. 다음으로 황문평이 13편, 김성태가 2편, 그 이외의 2, 3명이 한 편씩 담당하였다.

1970년대 후반부터 젊은 연출가들의 영화감독 진출과 다양한 음악적 효과, 그리고 세계적인 전자음악의 유행에 따라 정민섭(鄭珉燮)·김희갑(金熙甲)·이철혁(李哲赫) 등 젊은 영화음악인들이 대거 등장한다.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재즈음악을 전공하고 돌아온 정성조(鄭成朝)는 단연 이색적이다. 서울음대 교수 강석희(姜錫熙), 김정길(金正吉), 그리고 국악을 전공하는 박범훈(朴範薰)·김영동(金永東) 등이 새로운 영화음악을 창출해내고 있다. 1965년 자유중국의 영화음악을 위하여 초빙되었던 황문평은 「자군별후(自君別后)」 등 중국관현악단과 방송합창단을 동원, 대만과 홍콩에서 중국영화에 공헌하였다.

역대 영화음악상 수상자로는, 1962년부터 시상한 문화공보부의 대종상(大鐘賞) 음악상에는 정윤주가 세 번, 한상기·황문평·최창권·정민섭이 각각 두 번, 김성태·김대현·김동진·김희조·김영동·강석희 등이 한 번씩 수상하였다. 1958년부터 시상하였던 부일영화상(釜日映畵賞)의 음악상에는 정윤주·김동진·한상기·전정근·황문평·최창권·김성태 등이 수상하였다. 1963년부터 시상하였던 조선일보사 주최 청룡상에서는 김희조·이봉조·전정근·김동진·황문평·정윤주·최창권 등이 수상하였다. 외국영화제에서 국산영화의 수상한 기록을 보면 제7회 아세아영화제에서 김성태가 「흙」(장일호 감독)에서 처음으로 음악상을 수상하였다. 제9회 때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감독)에서 정윤주가, 제13회 때 「귀로」(이만희 감독)에서 전정근이, 제24회 때 「관세음보살」(최인호(崔寅鎬) 감독)에서 황문평이 각각 수상하였다.

1980년대 후반부터 30대의 젊은감독 기수들이 등장하면서 영화음악에도 젊은 작곡가들이 많이 참여하는 경향이다. 이들의 작곡기법은 종래의 관현악단을 동원하던 것과는 달리 주로 신데싸이저(synthsizer) 음악과 심지어 전자음악까지 등장시키고 있다. 최근에는 보다 좋은 음향효과를 얻기 위해 외국에서 음악녹음을 해오기도 한다.

문화체육관광부가 1991년을 ‘연극·영화의 해’로 제정했었다. 10월 27일은 ‘한국영화의 날’로 정해, 매해 행사를 치러 오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1991년 10월 27일 장충동에 있는 국립극장 무대에서 ‘우리영화 큰 잔치’로 영화음악제의 막을 올렸다. 72년 동안 한국영화의 발달역정을 파노라마적인 여러 영화의 주제가로 장식, 문예물 영상의 상징적 주제음악의 연주는 KBS TV의 관현악단과 합창단의 화려장엄한 연주이었다. 원로영화 음악가들의 공로패 증정식도 곁들여졌다. ‘한국영화의 날’ 기념식 때마다 영화의 각 분야별로 유공(有功) 영화인을 선출 표창해 왔다. 근간의 영화음악 유공자들의 표창 연도는 71년도 황문평(黃文平), 72년도 전정근(田正根), 73년도 김희조(金熙祚), 74년도 한상기(韓相基), 75년도 정윤주(鄭潤柱), 76년도 김동진(金東振), 77년도 김대현(金大賢), 78년도 박시춘(朴是春), 79년도 이인권(李寅權), 80년도 최창권(崔彰權), 83년도 정민섭(鄭珉燮), 84년도 이철혁(李哲赫), 86년도 김희갑(金熙甲), 88년도 이상우(李尙雨), 90년도 김인배(金仁培), 92년도 신병하(申秉河), 96년도 이종식(李鍾植)이다.

영화음악을 전문적으로 작곡하는 회원 수는 80여명에 이르고 있다. 90년도 사단법인 한국영화인협회의 각 전문분과가 8개 협회로 독립, 현재 연합회 형식으로 조직되어 있다. 영화음악작곡가협회는 초대 회장 김성태(金聖泰), 2대 김대현(金大賢), 3대 황문평(黃文平), 4대 김희조(金熙祚), 5대 전정근(田正根), 6대 한상기(韓相基), 7대 정윤주(鄭潤柱), 8대 최창권(崔彰權), 9대 이철혁(李哲赫)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참고문헌

『노래로 듣는 영화, 영화로 보는 노래』(이준희, 한국영상자료원, 2012)
『한국영화음악사 연구』(이진원, 민속원, 2007)
『문예총감』(최창봉 편, 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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