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2월에 김조성(金肇聲: 본명 金春光)을 대표로 임생원(林生員), 전세종(全世鍾), 전옥(全玉), 이업동(李業童), 전흑천(田黑泉), 정혜순(鄭惠順), 서일성(徐一星), 정복순(鄭福順), 나정옥(羅貞玉), 김신명(金信明), 황순덕(黃順德), 김인옥(金仁玉), 강수일(姜守一), 김송파(金松波), 김원호(金元浩), 손일평(孫一平), 이복본(李福本), 전경희(全景希), 윤익병(尹益炳), 이승하(李承夏), 김윤심(金允心), 박보옥(朴寶玉), 이정순(李正順), 신은봉(申銀鳳) 등 영화변사 출신들이 중심이 되어 스케치·넌센스·노래·만담·영화해설극 등 막간(幕間)에 여흥을 넣는 것을 전문으로 하여 창립된 극단이다.
예원좌(藝苑座)는 막강한 자본력을 앞세워 여러 신파극단에서 배우들을 스카웃하여 물의를 일으키면서 이류극단으로 출발하였다. 초기에는 조선극장(朝鮮劇場)·우미관(優美館) 등에서 「남북애화」·「주마등」·「눈나리는 진중」·「암흑가」·「아라비아연무곡」 등 주로 우리 영화 해설극을 공연하였다.
1938년부터는 김조성·박영호(朴英鎬) 등의 창작극도 공연했으나, 흥행만을 의식하여 영화 해설극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따라서 중앙공연보다는 지방순회공연이 많았다. 그러다가 대표인 김조성이 1940년 12월에 어용극단체인 조선연극협회(朝鮮演劇協會) 창립에 큰 몫을 하고부터는 활동무대를 서울로 옮겨서 창작극을 주로 하는 신파극단으로 탈바꿈하였다.
이후에는 이 극단은 동양극장(東洋劇場)·부민관(府民館)·우미관·영보극장(永寶劇場) 등 대극장에서 김조성·임선규(林仙圭)·송영(宋影)·이추운(李秋雲)·박영호·박신민(朴新民) 등의 장막극을 주로 공연하였다.
연출도 이서향(李曙鄕)·안종화(安鍾和)·홍해성(洪海星)·나웅(羅雄) 등 중견들을 초빙하였으며, 공연마다 흥행이 잘 되어 재정상태가 좋아지고 진용이 대폭 강화되었다. 이 결과 1943년 제 2회 국민연극경연대회에 송영 작·나웅 연출의 「역사」로 참가하여 각본상과 여자연기상(임효은)을 받았고, 이어서 제3회 국민연극경연대회에서도 박영호 작·이서향 연출의 「별의 합창」으로 여자연기상(이예란)을 받았다.
주요작품으로는 1935년 2월 21일 조선극장에서 「만화경」, 「생치쌈」, 「활동광」, 「대감놀이」 등 창립공연을 시작으로, 이후 「풍운아」, 「씩씩한 용사」, 「백제의 중신(重臣)」, 「놀아나는 총각」, 「집시와 룸펜」, 「장한몽」, 「독초(毒草)」, 「가정주부교육」, 「역사」 등을 공연했다.
1945년 7월 14일부터 23일까지 약초극장(若草劇場: 現 스카라 극장)에서 박영호 작·안종화 연출 「청실홍실」을 마지막으로 공연하였다. 극단은 광복 이후에 자동적으로 흩어졌다가 그 해 10월 극단 청춘극장(靑春劇場)으로 개칭·개편되었다.
예원좌는 일제의 탄압으로 신극이 침체되었던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중반까지 대중적 기반을 얻은 대표적 상업극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