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자강(子强), 호는 덕계(德溪). 오종은(吳從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오식(吳軾)이고, 아버지는 오세기(吳世紀)이다. 어머니는 성주도씨(星州都氏)로, 훈도 도영강(都永康)의 딸이다.
11세에 부친상을 당했으나 효성으로 소문이 났으며, 모친상 때에는 더욱 예의에 힘써 1549년(명종 4) 예조의 포상과 함께 왕으로부터 복호(復戶: 조세나 역을 면제함.)를 받았다. 14세 때부터 경(經)·자(子)·사(史)에 몰두했으나 집이 가난해 선생을 모실 수 없었다.
그래서 홀로 『중용』을 수백 번 반복 연마해 통달하고 『대학』·『논어』·『맹자』 등도 연구하였다. 조식(曺植)이 덕산동(德山洞)에서 강론하자 문인으로 수학했으며, 김인후(金麟厚)·이황(李滉)의 문인이기도 하다. 이황도 오건의 학문이 정밀하고 심오함을 칭찬하였다.
1552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58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67년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가 된 뒤, 이듬해 정언(正言)·헌납(獻納)·지평(持平)·교리(校理)·직강(直講)·사성(司成) 및 호조·예조·병조·공조의 좌랑, 검상(檢詳)·사인(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1571년(선조 4) 이조좌랑으로 있으면서 춘추관기사관을 겸해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경연(經筵)에서 학문의 길은 궁리(窮理)와 거경(居敬)에 있다고 논했으며, 소를 올려 학문을 진흥시키고 간쟁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분위기가 직언을 싫어하고 사류(士類)들을 외면하는 경향이 강하자, 1572년 이조정랑으로 있다가 관직을 버리고 경상도 산음 덕계리(德溪里)로 낙향하였다. 여러 차례 조정에서 불렀으나 모두 거절하고 서사(書史)를 섭렵하면서 시작(詩作)과 강론으로 여생을 마쳤다.
문인들이 ‘덕계선생(德溪先生)’이라 불렀으며, 산천의 서계서원(西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덕계문집』·『정묘일기(丁卯日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