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원거(元秬), 호는 역매(亦梅)·진재(鎭齋)·천죽재(天竹齋). 서울 출신이다. 아버지는 당상역관이며 지중추부사를 지낸 오응현(吳膺賢)이고, 아들은 3·1운동 33인의 한 사람인 오세창(吳世昌)이다. 조선 말기의 개화사상의 비조라 할 수 있다.
이상적(李尙迪)의 문하에서 한어(漢語)와 서화를 공부하였다. 가학(家學)으로 박제가(朴齊家)의 실학을 공부하였다. 1846년(헌종 12) 역과(譯科)에 합격하였다.
1853년(철종 4) 4월 북경행 사신의 역관으로 청나라의 수도 북경에 가서 이듬해 3월까지 머무르며 서양 열강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한 중국을 관찰하였다.
그 뒤 13차례나 역관으로 중국을 내왕하면서 『해국도지(海國圖志)』·『영환지략(瀛環志略)』·『박물신편(博物新編)』 등을 비롯한 다수의 신서(新書)들을 구입해서 연구, 1853∼1859년경에 최초로 개화사상을 형성하였다.
1860년 영불연합군의 북경점령 사건 때, 서양 열강의 근대적 무력과 경제력 앞에 붕괴되고 있는 중국의 참상을 보았다. 조선에도 곧 서양 열강의 침입에 의한 위기가 도래하고 있음을 절감한 오경석은, 구입한 신서들을 친우 유홍기(劉鴻基)에게 주어 읽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새로운 개화사상을 개진하여 유홍기의 개화사상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박규수(朴珪壽)가 영불연합군의 북경점령 사건에 대한 조선 조정의 위문사(慰問使)의 부사로 중국에 갔다가 큰 충격과 위기의식을 안고 돌아왔다. 이때 박규수의 개화사상 형성에도 오경석은 큰 도움을 주었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대원군에 의해 북경에 긴급히 파견되어 양요에 대한 중국측과의 연락 및 대책 수립의 자료를 수집하고자 하였다. 오경석은 북경에서 친교를 맺었던 청나라 조정의 실무 관료들과 광범위하게 접촉해 자료를 수집하였다.
이 자료를 토대로, 조선을 침공한 프랑스 동양 함대는 재정이 부족해 무역상들로부터 군비를 차입했고, 함대에도 군량을 3개월분 밖에 적재하지 못했기 때문에 단기의 정면 결전을 하지 말고 지구전을 전개해 3개월만 싸우면 프랑스 침공 함대는 패퇴할 것이라는 건의안을 대원군에게 제출하였다. 이 건의안은 프랑스 침공 함대를 격퇴하는 전략 수립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 밖에도 프랑스 동양함대의 조선 침공 직전의 주청(駐淸) 프랑스공사관과 청나라 총리아문(總理衙門) 사이의 왕복 문서를 중국인 친구를 통해 필사해서 본국에 보냈다. 또한 청나라의 실무급 관료들을 만나 병인양요에 대한 의견과 대처 방안들을 수집해 대원군에게 제출하기도 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와 제너럴셔먼호 사건(General Sherman號事件)을 겪은 뒤 조선의 위기가 더욱 급박해졌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오경석은 유홍기에게 서울 북촌의 영민한 양반자제들을 뽑아서 그가 중국으로부터 구입해 온 신서들과 그들의 개화사상을 교육하여 개화파를 형성해 나라에 일대 혁신을 일으키자고 제의하였다.
1869년 박규수가 평안도관찰사로부터 한성판윤으로 전임되어 상경하였다. 박규수에게도 북촌의 양반자제들을 발탁해 개화사상을 교육해서 개화파를 형성해 자주부강한 나라를 만들어 서양 열강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구할 것을 제안하였다.
1869년 말 개화사상의 세 비조인 오경석·유홍기·박규수는 동지로 완전히 결합하였다. 1870년 초부터는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박영교(朴泳敎)·김윤식(金允植)·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홍영식(洪英植)·유길준(兪吉濬)·서광범(徐光範) 등 다수의 영민한 양반자제들에게 개화사상을 교육하였다. 1874년부터는 이들을 중심으로 정치적 당파로서의 초기 개화파(개화당)가 형성되었다.
오경석은 병인양요 이후에는 자주적 개국을 실현하고 자주개화정책을 실시해 근대국가로 건설해야 할 필요를 더욱 통감하였다. 그리고 민족주체성이 강한 대원군이 집권한 기간에 준비를 갖추어 개국을 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판단하였다.
미국이 1871년 수호통상조약의 체결과 개항을 요청해 왔을 때, 오경석은 개국의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였다. 대원군에게 미국이 대통령의 국서를 가지고 와서 통상을 요청하는 이 기회에 개항을 단행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거절당하고 오히려 ‘개항가’라고 지목당하였다. 이후부터는 쇄국정책을 고수하는 대원군에게 오경석의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대원군과의 친근한 관계도 소원해졌다.
그러나 오경석은 미국 군함이 함포사격으로 무력 행사를 하면서 개국을 요구하는 신미양요를 일으키자 단호하게 대결할 것을 주장하였다. 신미양요의 뒤처리와 관련해 1872년 조선 조정이 박규수를 정사로 한 사절단을 파견할 때 수역(首譯)으로 지명되어 북경에 가서 신미양요의 수습과 관련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875년, 일본이 운요호 사건(雲揚號事件)을 일으키고, 이어 1876년 1월에 군함 5척을 이끌고 강화도 앞바다에 무력 침공의 위협으로 개국 통상을 요구하였다. 조선 조정(당시 외척정권)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의 외교활동의 업적에 의거해 오경석을 다시 발탁하여 문정관에 임명하였다.
조선 조정의 승낙 없이 강화에 상륙하려 하자 국제 관례에 없는 일이라고 일본측에 강경하게 항의하였다. 또한 조선 조정에 대해서도 이 문제에 강경하게 대처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무력 위협에 대응할 능력이 없던 조선 조정으로서는 오경석의 주장을 뒷받침해줄 수 없었다.
일본측이 일방적으로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에 상륙하였다. 1876년 2월, 강화부의 연무당에서 근대 최초의 한일회담이 진행되었다. 일본측은 세 차례에 걸친 회담 도중에 간헐적으로 함포로 위협 사격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조작한 운요호 사건의 책임을 도리어 조선측에게 떠넘겨 심하게 추궁하면서 회담에 유리한 위치를 장악하려 하였다.
오경석은 조선측 정사 신헌(申櫶), 부사 윤자승(尹滋承)의 막후에서 활동하면서 일본의 함포 위협을 즉각 중지하도록 항의하게 하였다. 일본측의 운요호 사건을 구실로 한 공격에는 중국 신문에 보도된 일본의 정한론(征韓論)을 들어 반격하도록 하였다. 또한, 오경석은 일본의 국기 사용에 대응해 조선의 국기 제작과 사용도 건의하였다.
당시 강화도에서 한일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조선 조정에서는 개국 문제를 둘러싸고 세 가지 견해가 형성되었다. 첫째, 김병학(金炳學)·홍순목(洪淳穆) 등 원로대신들과 대원군의 견해로서, 강경하게 척화론을 주장하고, 병인양요·신미양요 때와 마찬가지로 일전을 벌여서라도 일본의 요구를 강경하게 거절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둘째, 민규호(閔奎鎬)·명성황후 등의 주장으로서, 청국의 개국 권고에 따라 주견없이 개국을 주장하는 의견이다. 셋째, 박규수·오경석 등의 견해로서, 일본의 무력 위협으로 개국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나, 세계 대세로 보아 조만간 개국은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번의 승산 없는 전쟁을 피하고, 최대한으로 자주성을 지키면서 개국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오경석은 당시의 왕실 외척정권으로서는 군함 5척을 끌고 온 일본과 무력으로 대결해 승리할 능력과 의지가 없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때문에 최대한 사태를 수습하면서 개국하고 나서 대응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판단, 오경석의 의견을 박규수에게 개진해 개국을 추진하도록 하였다.
대원군은 오경석을 운현궁에 불러들여 개국을 거절하고 일본과 일전을 벌일 것을 지시하였다. 또 강화도에 사람을 보내 오경석을 심하게 힐책하기도 하였다. 오경석은 왕실 외척정권으로서는 일본과 일전을 벌여 보아야 사태가 더욱 불리해질 것으로 보았고, 또 대원군의 쇄국정책도 결코 나라를 구하는 방책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결국, 1876년 2월 26일 체결된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는 오경석의 바람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본의 극악한 무력 위협 속에서도 사태가 전쟁으로 치달아 준비 없는 조선이 더 큰 굴욕을 받지 않는 가운데 개국하게 하려고 노심초사하면서 사태 수습에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에 과로해, 일본측이 군함을 이끌고 돌아간 직후인 1876년 4월에 쓰러져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 사이 오경석은 외교활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1869년에는 통정대부, 1873년에는 가선대부, 1875년에는 자헌대부, 1877년에는 숭정대부를 거쳐 숭록대부의 직함을 받았다. 강화도조약 직후 병석에 누운 뒤 회복하지 못하고 죽었다.
서화 수집에 취미를 가져 중국과 국내에서 방대하고 희귀한 서화들을 수집·수장하였다. 매화를 잘 그려 일가를 이루었고, 예서(隷書)와 전자(篆字)를 잘 썼다. 금석학에도 일가를 이루어 『삼한금석록(三韓金石錄)』을 지었으며, 각지의 비석과 유적을 두루 답사하였다.
저서로는 『삼한금석록』 외에 『삼한방비록(三韓訪碑錄)』·『천죽재차록(天竹齋箚錄)』·『양요기록(洋擾記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