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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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단체
1925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소년운동단체.
이칭
이칭
경성소년연맹(京城少年聯盟), 조선소년연합회(朝鮮少年聯合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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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25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소년운동단체.
내용

1923년 4월 어린이날 행사를 주관하기 위해 결성된 비상설 소년운동기관인 소년운동협회(少年運動協會)에 불만을 품은 소년단체들이 1925년 5월 경성소년지도자연합회를 구성하고 연합기관으로서 오월회를 발기하였다.

여기에는 불교소년회·반도소년회·새벗소년회·명진소년회(明進少年會)·선명청년회소년부(鮮明靑年會少年部) 등과 천도교소년회·중앙기독교청년회의 일부 인사가 참여하였다. 그리고 정홍교(丁洪敎)·박준균(朴俊均)·이원규(李元珪)·김흥경(金興慶)·장무쇠(張茂釗) 등이 창립준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창립 총회 당일 회의 명칭을 경성소년연맹(京城少年聯盟)으로 개칭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일본경찰이 회명 변경을 반대하여 그대로 ‘오월회’라 부르기로 하였다. 이 날 발표된 강령은 다음과 같다.

① 우리는 사회진화법칙에 의해 소년총연맹을 체결함. ② 공존공영의 정신으로써 경성소년단체와 연결하여 소년사업의 증진을 도모함. ③ 상조상부의 주의와 인류 공존의 사상으로써 시대 조류에 순응하고자 하여 소년연맹을 완전히 달성하고자 함. 그리고 원만한 이상과 원대한 포부와 견실한 실력으로 이 연맹의 목적을 철저히 관철하기로 선언하였다.

그러나 무산소년운동을 표방한 오월회의 탄생은 한국소년운동을 양분시키고 말았다. 민족소년운동을 표방하는 소년운동협회측과 이에 대립되는 오월회측이 ‘어린이날’ 행사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암투함으로써 소년운동은 이후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였다.

1926년 어린이날 행사는 두 단체가 별도로 행사계획을 수립, 추진하여 혼란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 해 4월 순종이 사망하여 행사가 중단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두 단체의 대립은 격화되지 않았다. 결국, 1927년 어린이날 행사의 기념식이 따로 거행되었고, 사회의 지탄을 받게 되었다.

두 단체의 지도자는 사회의 비난이 고조되자 통합을 위한 모임을 가졌다. 같은 해 조선소년연합회(朝鮮少年聯合會)를 창립하였고, 오월회는 1928년 2월 6일 해체되었다.

참고문헌

「일제치하(日帝治下)에서의 한국소년운동고(韓國少年運動考)」(신재홍, 『사학연구(史學硏究)』 33, 1981)
「천도교소년운동(天道敎少年運動)과 그 영향(影響)」(윤석중, 『한국사상(韓國思想)』 12, 1974)
『동아일보(東亞日報)』
집필자
신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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