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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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에 기와를 입혀 내려온 끝을 막음하는 건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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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에 기와를 입혀 내려온 끝을 막음하는 건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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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국·일본의 고대 건축물은 목조에 지붕을 기와로 덮었는데, 기와는 암키와와 수키와로 구성된다.

암키와는 큰 원통을 세로로 4등분한 형태로서 여와(女瓦) 또는 평와(平瓦)라고 부르며, 수키와는 원통을 세로로 2등분한 형태로서 남와 또는 원와(圓瓦)라고 부른다. 암키와를 바닥에 깔고 수키와로 그 이음새를 덮어서 용마루에서 처마까지 기왓골이 나게 된다.

기와를 입혀 내려온 끝을 암키와는 호형(弧形), 수키와는 원형으로 막는데, 이 부분을 평와당(平瓦當)·원와당(圓瓦當)이라 하고 우리 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암막새기와·수막새기와라고 불렀다. 와당에는 적당한 문양을 조각하며, 이 문양은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으므로 미술사 연구의 대상이 된다.

기와로 지붕을 덮는 일은 중국에서 시작되었고 따라서 중국건축의 하나의 특색이지만, 은대(殷代)의 건축 유지(遺址)에서는 아직 기와가 발견되지 않아 나무나 풀로 지붕을 덮었던 듯하다.

기와는 주(周)나라 말 연(燕)의 하도(下都)인 역현(易縣) 또는 제(齊)의 국도인 임치(臨淄) 등에서 출토된 예가 있으나 이곳에서는 반원형의 와당을 포함한 많은 기와의 발견이 보고되었다.

한대(漢代)가 되면 궁원·관아·능묘·사당은 물론 일반 가옥에까지 원형의 수막새기와가 널리 사용되며, 문양은 문자·고사리·사엽(四葉)·동물 등으로 다양해지고 각 지방으로도 확산된다.

남북조시대가 되면 북조에서는 문자와 함께 연판문(蓮瓣文)이 등장하며 녹유(綠釉)를 입힌 와당이 출현하여 주목된다. 남조에서는 연판문이 크게 유행하였는데 이 시대 와당의 주연(周緣)은 문양이 없이 높으며, 연판은 중앙의 자방(子房)을 중심으로 만개한 형태로 조각된다.

이러한 흐름은 당대(唐代)가 되어도 계속되며, 당대 이후에는 수막새 주연에 연주문(聯珠文)이 가미되고 암막새에도 문양을 조각하였던 듯하다. 송대(宋代) 이후에는 유리와(琉璃瓦)를 사용하였으며, 명대(明代)에서는 암막새기와의 하단이 중앙으로 갈수록 처지고 궁궐의 수막새에는 황유(黃釉)의 용무늬가 장식되었다.

중국에서의 이와 같은 변화는 우리 나라에도 영향을 주어서 형태나 문양에서 시대적인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우리 나라에서 기와가 언제부터 사용되었고 와당이 언제부터 나타났는지는 정확히 밝힐 수 없으나 삼국시대부터임은 분명하다.

삼국시대 건물터에서 비로소 와당이 발견되고 있는데, 고구려의 장군총, 신라의 황룡사지, 백제의 미륵사지 등에서 각국의 특징이 있는 와당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백제 위덕왕 35년(588)에는 일본에 와박사(瓦博士)를 파견할 정도로 발전되어 있었다. 삼국시대부터 쓰기 시작한 와당은 조선시대까지 계속 사용되면서 시대에 따라 특징 있게 변화한다.

우리 나라의 막새기와는 기본적으로 암막새기와와 수막새기와의 두 가지로 대별되고, 이와는 별도로 서까래기와와 부고기와(지붕마루의 차꼬막이 위에 세워서 대는 수키와)가 있다.

암막새기와에는 합각머리에 맞도록 두 장의 암막새기와를 V형으로 연결한 특수형이 있고, 수막새기와에는 원와당·반와당 등 형태에 따른 구별이 있다. 또 위치에 따라 타원형 막새기와와 곱새기와가 있다.

서까래기와는 서까래 끝에 붙이는 기와로서 서까래의 굵기나 모양, 즉 원형 혹은 방형에 따라 형태가 다르나 기본적인 공통점은 주연부가 없고 중심에 못구멍이 있는 점이다. 부고기와는 마루벽기와라고도 불리며 지붕의 마루를 쌓을 때 수키와 등과 암키와 골로 해서 생기는 공간을 메우는 기와로서 아직까지는 고구려의 유적에서만 발견된다.

반와당은 반원와당을 말하며 원을 가로로 2등분하여 위의 반원만 있는 형태이다. 와당으로서는 가장 고식(古式)으로 중국에서는 주대(周代) 이후 한대까지 유행하다가 한대 이후에는 소멸되었으며, 우리 나라에서는 고구려시대에만 사용되었다.

타원형 수막새기와는 합첨골을 형성하는 합첨기와 끝에 붙는 막새기와이며, 곱새기와는 추녀 마루가 밑으로 내려오면 끝이 들리게 되므로 그러한 곡선에 맞추어서 그 모양이 마치 곱사등 같은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막새기와에는 이따금 유약을 입히는 수가 있는데, 중국에서는 북위시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우리 나라에서도 삼국시대부터 나타나고 있으니 익산 미륵사지 출토의 백제 녹유 원와당은 가장 뚜렷한 예이다.

또, 통구(通溝)지방 태왕릉(太王陵)에서 발견된 와당에는 문양면에 주칠(朱漆)한 예가 있으며 백제시대 와당에도 그러한 예가 있다.

와당의 문양은 와당의 형태에 따라 변화가 많다. 4분원 넓이의 암막새기와는 옆으로 긴 공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맞는 문양, 즉 만초류(蔓草類)인 당초문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그러나 암막새기와는 주로 삼국시대 이후에 유행한 듯 삼국시대의 예는 극히 드물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암막새기와가 본격적으로 사용되어 조선시대까지 계속되나 형태는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고 문양에도 차이가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문양이 가장 화사하여 당초문과 함께 인동(忍冬)·포도·보상화(寶相華) 등 식물계 문양과 봉·앵무·오리·기린·용·비천(飛天) 등 동물계 문양을 대칭으로 곁들여서 긴 공간을 균형 있게 처리하였고, 수막새기와도 동일하지만 주연에 연주문을 찍어 더욱 장식효과를 냈다.

고려시대에는 신라 양식을 계승한 당초문계의 문양이 장식되나 형태의 변화와 함께 햇무리무늬라는 새로운 문양이 나타나고 범자(梵字)가 등장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면이 밑으로 넓어지며 화문·용 등이 조각되고 제작 연월일 또는 제작 연유, 제작 관계자 성명 등의 문자가 새겨져 하나의 특색을 이루게 되었다.

정원(正圓)을 이루는 수막새기와의 무늬는 중앙의 자방을 중심으로 만개한 연꽃을 위에서 본 형태가 가장 많아서 삼국시대에는 삼국 모두 이 문양이 주류를 이룬다. 다만 고구려의 경우는 한(漢)·낙랑 기와의 영향을 받아 자방 대신 반구형의 돌기가 있고 면을 몇 개의 선으로 구획한 다음 그 안에 문양을 배치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유의 문양은 대칭을 이루는 점이 특색이다.

이 경우 백제나 고구려에서는 문자를 곁들이는 수가 있고, 고구려에서는 연판에 인동·귀면(鬼面) 등을 교대로 배치하는 수도 있다.

이러한 규칙적인 문양 외에도 고구려에서는 반규문(蟠虯文)·유규문(游虯文)·용문 등이 활달하게 조각되며, 백제에서는 문양이 없거나 사파(四巴)의 매우 간단한 문양도 있다.

삼국시대 수막새기와 문양은 이상과 같이 고구려에서 가장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통일신라시대가 되면 더욱 다양해져서 여전히 연판문이 주류를 이루지만, 이 밖에 보상화문(寶相華文)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면서 등장한다.

또, 고신라시대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귀면문이 자주 사용되고, 오리, 가릉빈가(迦陵頻伽 : 불경에 나타나는 상상의 새), 날개 달린 사자(獅子)와 기린(麒麟) 등의 특수한 문양이 나타나며, 또 사람얼굴 또는 두꺼비와 토끼를 새긴 예가 있다.

특히, 자방이 있어야 할 자리에 왼 글씨로 ‘在城’이라고 새긴 와당이 경주 월성에서만 발견되어 주목된다.

고려시대의 수막새기와 문양은 연판문이 여전히 유행하나 연판의 형식은 끝이 뾰족해지거나 국화모양이 되며, 한편 이 시대의 특색인 햇무리무늬가 유행하고 쌍봉문(雙鳳文)·귀면문·모란문·범자문 등도 나타난다. 특히, 암막새·수막새 모두 귀면문양이 유행함은 주목된다.

조선시대의 수막새기와는 달걀 모양으로 문양에는 연판문·새무늬·기하문·인면 등이 있으나 수법은 매우 쇠퇴하고 미감을 전혀 느낄 수 없다.

반와당은 면이 위가 둥근 반원형이므로 그 공간에 맞는 문양으로서 당초문이나 인동문 계통의 문양과 사지를 활짝 펴고 몸집을 크게 표현한 귀문(鬼文) 또는 개구리 같은 동물 문양이 나타난다. 서까래기와는 주연부는 없으나 정원 또는 방형으로서 문양이 다양하다.

원형일 경우는 연판문이 가장 보편적인 문양이어서 자방 중앙에 못구멍이 있고, 연판의 형식은 수막새기와와 같다. 방형의 경우는 대개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형태로 사화 혹은 육화형,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구름을 곁들인 햇무리무늬, 고구려시대의 와문(渦文:소용돌이모양의 무늬) 등이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백제의 서까래기와로서 두 눈과 입을 크게 표현하고 공간을 수염으로 채운 정방형의 작품이 있어 주목된다. 부고막새기와는 사다리꼴에 좌우가 수키와 곡선에 맞도록 안으로 둥글려서 위가 넓고 밑이 좁은 형태에 양선(陽線)으로 귀면의 얼굴만을 표현하였다. 고구려시대 유적에서만 출토되는 특색 있는 형태이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백제·신라가 모두 기와집을 지었고 와당이 붙은 막새기와를 사용하였음은 많은 유적에서의 출토 예로 보아 증명되지만,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가 언제부터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지금까지의 출토 예에 나타나는 문양, 또는 고구려시대 고분벽화에 그려져 있는 기둥·공포 등의 건축도, 또는 쌍영총(雙楹塚)의 팔각기둥, 특히 천왕지신총(天王地神塚)의 목조건축의 구조 등을 참고하면 아마도 2세기경까지는 출현하였으리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고구려가 일찍부터 낙랑을 통하여 들어온 한문화에 접하였고 그들이 남긴 많은 유적에서 적지 않은 와전(瓦塼)이 발견되었으며, 그 가운데에는 ‘光和五年(後漢, 182년)’명의 전이 황해도 봉산군에서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추정할 수 있다.

또한, 그 영향의 일단으로 평양 토성터에서 ‘大晉元康(291∼299년)’의 문자가 4등분한 구획 속에 새겨진 수막새기와가 발견된 점으로도 짐작된다.

(1) 고구려

고구려는 지리적인 조건도 있었지만 일찍부터 중국문화와 접촉이 긴밀하였고, 낙랑군을 통한 한문화의 유입으로 직접적인 교류가 이루어져 백제나 신라에서 볼 수 없는 반와당 또는 부고막새기와를 사용하였다.

문양에 있어서도 중국류의 용 계통 문양, 또는 낙랑의 고사리무늬 계통 문양, 또는 바퀴살 모양으로 와당면을 4등분·6등분 혹은 8등분하는 한대 와당 계통, 연판문을 이용하되 중앙의 자방 대신 융기된 반구형을 배치하여 연판문으로서의 양식이 정립되기 이전의 양상이 나타난다.

와당에서 성격이 가장 잘 나타나는 문양은 연판문으로서, 비교적 초기에 속하는 고구려 와당의 연판문은 6판문·4판문 등의 연판 양 끝이 뾰족하고 단면이 3각형에 가깝도록 융기되고 다시 세로줄을 내어 매우 경직되고 예리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양식상의 특징은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의 하나이다. 또, 고구려 와당 중에는 붉은 색이 나는 것이 많은 점이 특색인데 태토(胎土)로 사용된 토양에서 생기는 차이로 보인다.

(2) 백제

고구려 와당에 비하면 백제 와당은 여러 가지 면에서 대조적이다. 백제는 지리적인 관계로 중국 남조와 문화적인 연관이 깊었고 불교문화의 영향 아래 처음부터 연판문이 사용되었다. 중앙의 자방을 중심으로 자방 쪽이 좁고 주연 쪽이 넓어지는 연판을 구획선 없이 8판을 배치하는 형식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부여 쌍북리에서는 고구려 와당같이 두 줄 구획선으로 4등분한 속에 끝이 뾰족한 연판을 배치하고 연판 끝 좌우에 삼각점을 찍은 것이 출토되었다. 경기도 광주시 광장리에서는 북위계의 연판 8엽을 배치한 수막새기와가 출토되었는데, 이 경우도 중앙에는 자방을 두어 고구려의 반구형 돌기형식과는 구별된다.

이와 같이 백제 와당은 연판문 일변도이지만 연판 자체의 표현양식은 일견하여 고구려와 구별되는 온화하고 유연한 느낌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세련된 유연미가 극치에 달하면 무문와당 또는 사파문와당(四巴文瓦當)에 도달하게 되는데, 사파문 또는 무문의 수막새기와는 고구려나 신라에서는 발견된 예가 없다.

백제의 수막새기와에도 연판문 사이에 ‘王’·‘夫’·‘大’ 등의 문자가 새겨진 예가 있으나 그 뜻은 분명하지 않다. 1변 10.2㎝의 방형 귀면 서까래막새기와는 고구려에서 많은 귀면기와를 제작하였음에도 이와 같은 강조와 생략을 대담하게 적용시킨 동시에 해학마저 나타나는 표현은 출현하지 않았다.

또 하나 익산시 왕궁면 제석사지에서는 인동당초문 암막새기와 파편이 발견되어 주목되고 있다. 이 기와는 문양의 양식이나 출토지로 보아 백제 와당이 분명하여 삼국시대 암막새기와의 유일하고 확실한 예이다. 백제 수막새기와에는 이따금 녹유를 입힌 것이 발견되어 주칠 와당의 사용례와 함께 화사한 의장으로서 주목된다.

(3) 고신라

고신라의 와당은 종류나 문양이 삼국 중 가장 단순하다. 막새기와로는 수막새기와만 사용되었고 문양은 연판문 뿐이다. 연판의 배치 형식은 구획선 없이 자방을 중심으로 연속 배치하되 8판이 기본형이고 간혹 6판도 있으며,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차츰 판수가 증가한다.

연판의 표현양식도 양 끝이 뾰족하고 한 줄의 융기선이 있거나 꽃잎 끝 좌우에 모가 나는 등 고구려 연판과 같은 양식이 있고, 또 꽃잎 끝이 약간 반전되고 그 좌우가 넓어서 서로 간격 없이 밀착되는 백제식 연판 형식의 두 유형이 있으나 백제식의 연판 형식이 우세하다.

이것은 신라가 고구려·백제 양국의 문화를 모두 수용하였으면서도 백제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암막새기와의 사용예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4) 통일신라시대

안압지에서 ‘調露二年(唐)’명 보상화문전의 출토례로써 문화가 삼국통일과 함께 급속도로 발전하였음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국토의 확장에 따르는 국력의 신장은 자연 여러 가지 토목공사를 일으키게 되고 그 중에서도 궁전·사찰 등 목조건축의 성황과 이에 따르는 장식성의 강조로써 지붕을 치장하는 일이 크게 일어나게 된다.

삼국시대에 사용하던 암막새·수막새·서까래막새 등은 물론 타원형 합첨막새·귀면기와·치미(鴟尾) 등과 위치에 따라 생기는 귀내림새기와·곱새기와 등의 특수 와당까지 출현하게 되었다.

이러한 각종의 기와를 얹었던 신라시대의 건축물은 지금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으나, 이들의 유적에서는 무수한 기와가 발견되고 각종 문양이 조각된 기와도 다수 출토된다.

통일신라시대 수막새기와의 문양은 전대에 이어 연판문이 주류를 이루나 당대(唐代)에 완성된 보상화문의 전래로 이 문양이 연판문과 대치되기도 하고 함께 쓰이기도 하였다. 보상화문은 이 시대의 미술품에 새로이 등장하는 문양으로서 수막새기와에는 빈번히 사용되었다.

수막새기와에는 또 각종 동물 문양이 이용되는데 그 중 가릉빈가는 불교적인 의미로 사용되며, 귀면은 벽사(辟邪)의 뜻이 있다.

대아문(對鵝文)은 길상적(吉祥的)인 의미가 있을 것이며, 날개 달린 사자와 기린 등은 서방 유익문화(有翼文化)의 영향임이 분명하다. 암막새기와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당초문이 새겨지며 인동·포도·보상화 등이 부차적으로 첨가되기도 하고 당초문 이외에 꽃무늬로 장식되기도 한다.

동물 문양은 대칭으로 배치하고 공간은 당초문·구름무늬·꽃무늬 등으로 메워서 수막새기와에 비하면 한층 화려하다.

통일신라시대 막새기와의 특징은 수막새·암막새가 모두 주연에 연주문대를 돌려서 장식효과를 한층 높인 점과, 특히 밑에서 올려다 보이는 측면에도 문양을 새긴 점이다. 또, 두꺼비와 토끼·인면·불상 등을 새긴 수막새기와가 1점씩 발견되었다.

수막새기와의 연판문은 말기에 가까워지면서 꽃잎 수가 늘어서 국화같이 되는데 이러한 형식은 다음 시대인 고려시대로 이어진다.

(5) 고려시대

고려시대가 되어도 수막새기와·암막새기와·서까래막새기와 등이 계속 사용되나, 암막새기와는 형식에 변화가 생기고 문양도 국화같이 된 연판문 외에 새로운 문양이 등장한다.

전대의 암막새기와에는 폭이 같은 4분원 문양대가 있었으나 부석사에서는 밑이 괄호형으로 처지는 새로운 형식의 암막새기와가 출토된 일이 있다.

수막새기와에는 중앙에 반구형 돌기와 그 주위에 두 줄의 융기선을 친 GOT무리무늬가 새로이 등장하며, 암막새기와에는 이 무늬가 2∼3개 배열된다. 연판문은 국화같이 꽃잎 수가 많아지거나 끝이 뾰족하고 뿌리에 여러 개의 세로줄이 오목새김되는 새로운 형식이 등장한다.

귀면문·당초문·쌍봉문·범자 등이 수막새기와와 암막새기와에 모두 나타나고, 주연에는 전대의 여운으로 연주문이 남지만 없는 것도 많다. 문양의 표현은 신라시대에 비하여 평면적이 되어 입체성이 결여된 점이 큰 차이라고 하겠다.

고려시대의 와당 가운데서 가장 주목되는 존재는 청자와당이다.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요지(窯址)에서 발견된 막새기와들은 주연에 연주문이 있고, 그 안의 수막새기와에는 모란문이, 암막새기와에는 당초문이 돋을새김되었다.

≪고려사≫에는 의종 13년(1159)에 궁궐 동쪽에 양이정(養怡亭)을 짓고 청자기와로 지붕을 덮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아마도 이 때 소용된 청자기와는 강진가마에서 공급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토제의 기와보다 작은 것은 못가의 정자 지붕을 입히는 데 적당한 크기이며, 여기에 새겨진 문양에는 고려 특유의 수법이 나타나 있다.

고려시대의 와당은 둔중하고 평면적인 점이 하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고 전시대의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양식으로 이행하였으며, 한편에서는 다음 시대의 양식이 싹트기도 하였다.

(6)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와당은 형태·문양에서 더욱 퇴보하여 미적 감각이 크게 감소된다. 형태는 암막새기와는 밑이 둥글게 처져서 마치 반월형같이 된 것과 처진 중앙이 뾰족해지고 좌우에 몇 단의 굴곡이 있어 거의 3각형을 이루는 형태로 대별된다.

수막새기와도 대체로 정원(正圓)의 전통을 지키나 밑이 처진 달걀 모양이 많아진다. 또한, 와당의 부착 방향이 고려시대까지는 기와에서 직각으로 꺾이는 데 비하여 조선시대에는 둔각을 이루며, 시대가 내려올수록 각도가 커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문양은 연판문이 여전히 사용되나 꽃잎의 사실성은 찾을 수 없고, 전대의 여운으로 봉황·범자·귀면 등이 사용되나 귀면은 사람 얼굴에 가까운 조잡한 표현이고 도안화된 ‘壽’자가 이 시대의 새로운 문양으로 등장한다.

암막새기와에는 당초·꽃·용·새·범자 등이 계속 사용되나 여러 개의 세로줄을 친 다음 그 사이에 연호·인명 등을 돋을새김하는 형식이 유행하였다. 조선시대 와당 문양은 동일계 문양의 양식적 변천 같은 것은 찾을 수 없다.

한국 와당에 관한 연구는 그다지 활발하다고 할 수 없다. 일찍이 1904년 일본인 세키노(關野貞)가 ≪한국건축조사보고 韓國建築調査報告≫에서 와당에 관심을 표명하였고, 1905년 이마니시(今西龍)는 경주에서 신라시대 와당을 수집하였다.

한편, 세키노는 1922년과 1923년 9회에 걸쳐 ≪건축세계 建築世界≫ 잡지에 <조선의 와문양 朝鮮の瓦紋樣>이라는 제목으로 낙랑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우리 나라 와당 문양을 개관하였다.

1934년 경도제국대학에서는 ≪신라고와의 연구 新羅古瓦の硏究≫를 발간하여 고신라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시기의 와전을 집성하여 우리 나라 와당의 다양하고 우수함에 일찍부터 주목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우리 와당에 대한 일본인들의 이와 같은 관심은 자연 일본으로의 자료 유출을 촉진하여 상당량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우리 나라 사람으로는 고유섭(高裕燮)이 발표한 <삼국미술의 특징>이라는 글 속에 포함된 <와당문의(瓦當紋儀)로 본 삼국의 특색>이라는 논고가 삼국시대 와당 문양의 특색에 관심을 표명한 최초의 예가 아닐까 한다.

광복 후 와당에 대한 관심이 커져서 공주교육대학의 박용진(朴容瑨)은 백제 와당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여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1976년 동산문화사(東山文化社)편의 ≪신라의 기와≫, 1972년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의 ≪백제와전도보 百濟瓦塼圖譜≫ 등이 발간되었으나 심층적 연구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1976년부터 3년간에 걸쳐 일본 이우치(井內)고문화연구실에서 발간한 ≪조선와전도보 朝鮮瓦塼圖譜≫ 전7권은 아직까지 발간된 우리 나라 와전에 관한 가장 방대한 자료집이 될 것이다.

참고문헌

『백제와전도록(百濟瓦塼圖錄)』(김룡향 편, 충남대학교백제연구소, 1972)
『옛기와』(김성구, 대원사, 1982)
『백제와전도록(百濟瓦塼圖錄)』(백제문화개발연구소, 1983)
『韓國の瓦塼』(井內功, 井內古文化硏究室, 1980)
「통일신라시대의 와전(瓦塼)연구」(김성구, 『고고미술』 162·163, 1984.9.)
집필자
진홍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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