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가 낙랑군을 통치하는 데에는 본국의 국내정세와 낙랑 토착세력의 움직임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당시 한나라에서는 외척세력출신의 왕망(王莽)이 등장하여 왕위를 찬탈, 신(新)나라를 건국하였고, 또 왕망이 타도된 직후에도 적미적(赤眉賊)의 난은 평정되지 않았으며, 지방세력의 할거는 여전하였다.
이러한 중국의 혼란을 틈타서 낙랑지역의 토착 호족인 왕조는 서기 23년에 낙랑태수 유헌(劉憲)을 살해하고 스스로 ‘대장군낙랑태수(大將軍樂浪太守)’를 칭하였다. 그를 중심으로 낙랑군 통치에 반대하는 토착 주민들의 반항운동은 7년간이나 계속되었다.
30년에 후한의 광무제(光武帝)가 새로 파견한 낙랑태수 왕준(王遵)은 반항운동을 진압하기 위하여 군대를 이끌고 요동에 이르렀다. 이 때 왕준에게 협력하는 토착 한인(漢人)인 군삼로(郡三老) 굉(閎)과 군결조리(郡決曹吏) 양읍(楊邑) 등에게 살해당하였다. 그리고 왕준이 부임하게 되자 토착 주민들의 반항은 평정되었다.
그러나 낙랑군은 왕조의 난을 계기로 동부도위(東部都尉)를 폐지하여 영동의 7개현은 옥저 및 예맥의 대군장(大君長)을 현후(縣侯)로 삼아 자치를 허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