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재 이단하 내외분 옷 ( 옷)

의생활
유물
문화재
조선 중기의 문신 이단하(李端夏)와 그의 부인이 입었던 17세기 옷과 부속품 6점.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 이단하(李端夏)와 그의 부인이 입었던 17세기 옷과 부속품 6점.
개설

이 유물은 조선 중기 문신 이단하(李端夏: 1625∼1689)와 그의 부인이 정경부인의 신분으로 입었던 복식과 수식류 6점이다. 후손에 의해 대대로 전해져온 전세품이다. 이단하의 호는 외재(畏齋)이며 송시열의 제자로서 현종 3년(1662) 문과에 급제한 이후 숙종(肅宗)대에 대제학 ·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까지 역임하였다. 유물은 이단하가 좌의정 시절에 입었다고 전해지는 중치막(中致莫) 1점과 그의 부인이 입었던 원삼(圓衫) 1점, 누비저고리 1점, 봉대(鳳帶) 1점, 도투락댕기(都多益唐只) 1점, 용잠(龍簪) 1점, 다리 1개 등 모두 7점이 전해졌으나 다리는 분실되어 현재 6점이 보존되어 있다. 유물은 17세기 후반기의 복식 양식을 보이고 있으며 특히 원삼과 그 부속품은 전세 유물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유물이다. 1965년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어 현재 강원도에 소재한 후손 이위의 집안에서 소장하고 있다.

내용

중치막 1점은 공이 좌의정 시절에 입었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모시로 만든 홑 중치막이다. 사대부들이 관복 속에 입거나 겉옷으로 평소에 입는 것으로, 문헌에는 “中赤莫”, “中致莫”, “重赤莫” 등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1580년대 ‘순천김씨묘 언간’에 “듕치막”으로 언문 표기되어 나타난다. 옆선에 트임이 있는 것이 특징으로 옆선에 부착된 무의 유물와 옆트임의 길이, 소매 모양으로 시대 구분이 가능하다. 이단하의 중치막은 넓은 두리소매형, 양쪽 옆선에 달린 무가 없어지고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옆트임이 겨드랑이 아래부터 시작되는 등 17세기 중반의 특징을 보인다. 고운 모시로 만든 홑옷으로 깃은 칼깃이고 동정은 소실되었다. 뒷길이 123cm, 화장 116cm, 뒷품 55cm, 진동 31cm, 소매 배래 45cm, 수구는 24.5cm이다.

원삼 1점은 이단하의 부인이 정경부인으로서 입었던 대례복으로 대대(大帶)와 도투락댕기, 용잠 등의 부속품과 함께 후손들이 대를 이어 혼례에 사용하였다. 유물 원삼은 직금 무늬가 있는 녹색 겉감에 홍색 공단의 안감이 있고 사이에 두터운 한지를 심감으로 사용한 겹원삼으로 직금 봉황흉배(鳳凰胸背)가 부착되어 있다. 겉감은 녹색의 수 · 복(壽福), 석류(石榴) 등의 문단(紋緞) 바탕에 어깨에서 소매에, 그리고 무릎 부분에 바탕과 동일한 문양으로 직금(織金)된 통수스란[通袖膝襴] 형식의 직금단(織金緞)이다. 안감은 홍색의 공단 길에 소매는 무명으로 되어 있다. 안감에는 청색 선단이 5.2∼6㎝로 불규칙하게 둘러져 있으며 선단을 두른 후 겉감과 함께 바느질하였다. 앞길이 120㎝, 뒷길이 130㎝로 앞길이가 뒷길이보다 짧은 전단후장형이며 화장 104㎝, 품 56㎝, 고대 18㎝, 진동 24㎝, 소매너비 69㎝이다. 소매 끝에는 3.5㎝ 너비의 홍 · 황 2색의 직금단 색동에 너비 14㎝의 명주 한삼(汗衫)이 달려 있다. 한삼은 현재는 명주로 되어 있으나 시접 부분에 남아 있는 조각을 통해 처음 제작 시에는 흰색 운문단(雲紋緞) 한삼이었음이 확인되었다. 깃모양은 겉감 깃은 끝이 둥근 배자깃형으로 겉은 녹색이고 안쪽은 안감과 동일한 공단이다. 안감 깃은 너비 7.5㎝로 들여 달린 목판깃이며 동정이 달렸다. 가슴과 등에 부착된 흉배는 녹색 화문단 바탕에 봉황이 수놓인 봉황흉배인데 가장자리에 연금사가 일부 남아 있다. 안쪽 흉배 마무리 옷감은 녹색 사(紗)로 되었다. 크기는 가로 24.5cm, 세로 29cm이다.

누비저고리 1점은 섬세한 명주 옷감에 솜을 놓아 3.5cm 간격으로 누빔한 누비저고리이다. 깃의 모양이 목판 당코깃이고 뒷길이 50cm, 화장 64cm, 뒤품 54cm, 진동 25cm, 수구 20cm의 크기로 저고리 길이와 품에서 많은 여유를 보이는 전기(前期)에 비해 짧아지고 품도 작아져 신체의 치수가 반영된 당시의 제도를 확인할 수 있다. 저고리 양식으로 보아 여성용으로 추정된다.

대대(大帶) 1점은 다홍색 공단 바탕에 봉황문을 금박(金箔)한 것으로 띠 중앙을 중심으로 봉황이 마주하고 있다. 원삼에 둘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길이 330cm, 너비 5.5cm의 원형이 복구되었다. 110cm 옷감을 3길로 이어서 만든 것으로 안에는 두꺼운 한지 2겹을 접어 심지로 사용하였다. 봉대의 안쪽 면에는 봉대를 고정시키는 작은 끈이 좌우에 달려 있다.

도투락댕기 1점은 원삼의 수식으로 사용된 것으로 주로 혼례용으로 사용되는 큰 댕기를 말한다. ‘도투락[都吐絡]’이란 용어는 ‘도다익(都多益)’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래 금박을 의미한다.『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상의원(尙衣院)에 소속되어 있는 2명의 도다익장(都多益匠), 즉 금박을 찍는 장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 문헌『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귀한 신분의 처녀들이 머리를 땋고 그 끝에 금화(金花)를 그린 두 갈래의 댕기를 다는데 그 댕기를 ‘도투락[圖吐絡]’이라고 하여 금박 자체가 아니라 댕기의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경부인의 도투락 댕기는 너비 10.5㎝, 길이 300㎝를 반으로 접어 끝을 삼각형으로 마무리한 다음, 2줄로 길게 늘어뜨린 모양이다. 따라서 완형의 크기는 길이 150㎝, 너비 21㎝가 된다. 짙은 보라색에 가까운 자주색 명주[紬]에 다양한 금박 무늬를 찍었으며 안에는 한지를 심지[按紙]로 사용하였다. 전체에 금박이 찍혀 있는데, 금박의 무늬는 용문 · 봉문 · 모란문 · 수복(壽福)문 · 국화문 · 화문 · 동자문이 있고 그 사이 마다 소형 원형문이 찍혀 있다.

용잠 1점은 동(銅)에 도금(鍍金)한 것으로 용머리 부분과 비녀 끝에만 도금하여 화려하게 꾸몄다. 총길이는 37.5cm이다.

의의와 평가

외재이단하 내외분옷 중 원삼과 부속품은 현존하는 유물 중 가장 오래된 전세 유물이다. 후손들이 혼례 등에 실제 사용하였으며 전래 과정에서 원삼 · 도투락댕기 · 봉대를 보수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 도투락댕기와 봉대는 2006년 전문기관의 재보수 작업에서 원형 치수로 복구되었다. 원삼은 선단 너비를 줄이거나 소매 안감으로 무명을 사용하였고 소매 배래를 4겹 바느질로 마무리하는 등 원형이 변한 흔적이 많은 편이다. 이러한 사실로 원삼이 정경부인의 활동 시기인 17세기 말기의 원형이 유지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문화재대관-중요민속자료 2 복식·자수편』(문화재청 편, 2006)
『조선시대 여인의 멋과 차림새』(박성실·조효숙·이은주, 단국대학교 출판부, 2005)
『조선 숙종·인현왕후의 가례의식 연구』(한국문화재보호재단 편, 2004)
『한국의 관복』(고광림, 화성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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