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천 신암리 유적 ( )

선사문화 /고대사
유적
북한 평안북도 용천군에 있는 석기시대 이후 집터와 유물포함층 관련 복합유적.
이칭
이칭
신암리모래산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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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북한 평안북도 용천군에 있는 석기시대 이후 집터와 유물포함층 관련 복합유적.
개설

용천군 군소재지에서 동북으로 4㎞ 정도 떨어져 있는 신암리 부락의 서·남·북쪽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구릉에 위치한다. 서쪽은 청등말래 유적, 남쪽은 공동묘지, 북쪽은 모래산 유적으로 각각 명명되어 있다. 1964년에서 1965년에 김용간·이순진 등이 3차에 걸쳐 모래산과 청등말래 유적의 3지점을 발굴 조사하였다.

내용

청등말래 유적의 층위는 표토층(30㎝) 밑에 문화층인 검은모래층(30∼50㎝)과 생토층인 황색모래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검은모래층에서는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넘어가는 시기의 파괴된 집터 1기가 조사되었다.

집터는 남쪽은 서벽 9m, 깊이 30㎝인 장방형 움집터로서 바닥은 진흙을 깔아 다졌다. 이 곳에서는 복원 가능한 토기 15점과 반달돌칼〔半月形石刀〕·돌살촉·돌도끼·달도끼〔環狀石斧〕·대팻날·돌낫·숫돌·그물추·가락바퀴〔紡錘車〕·팔찌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중에서도 이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는 쌍타자 유적 3기층의 토기와 서로 통한다. 토기 구성에 나타난 이러한 공통점은 압록강 하류 지방의 청동기시대 주민들과 요동반도 남쪽끝의 주민들 사이의 문화적 연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들이 같은 생활풍습을 가진 종족이었음을 말해준다.

모래산 유적의 층위는 표토층(20㎝) 밑에 황갈색사질토층(20㎝)과 검은모래층(20∼25㎝)으로 구성되어 있다. 황갈색사질토층에서는 잔·시루·회색경질토기·쇠칼·도끼날형쇠촉·쇠못·쇠도끼·말재갈·금귀걸이 등의 고구려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검은모래층은 청동기시대층으로서 화분형 토기가 출토되는 초기철기시대의 구덩이로 인해 일부 교란되어 있었다. 검은모래층에서는 미송리형 토기가 출토되는 집터 5기와 시설물 1곳이 조사되었다.

집터는 장축방향이 서남에서 동북인 길이 20m, 규모 20∼40㎡의 장방형 움집터이다. 점토를 펴 다진 바닥에서는 돌로 테를 돌려 만들기도 하고, 진흙과 모래를 섞어 만든 화덕이 조사되었다. 이들 집터에서는 미송리형 토기·겹아가리〔二重口緣〕토기·외반아가리단지(壺) 등의 토기와 미늘식〔逆刺式〕돌살촉·돌도끼·반달돌칼·돌끌·숫돌·달도끼·가락바퀴 등의 여러 석기들이 출토되었다.

이 유적에서는 6개의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신석기시대 만기에서 민무늬토기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1기)·민무늬토기 조기(2기)·민무늬토기 초기(3기)·민무늬토기 중기(4기)·초기철기시대(5기)·고구려시기(6기)로 구분된다.

1기는 중국 요동반도의 민무늬토기시대 문화와 한반도 서북지방의 신석기 만기문화가 공반되는 양상을 보인다. 2기는 1기의 문화에 중국 요령지방·장산열도의 가지무늬〔彩文〕토기·바리형〔鉢形〕 토기 등이 추가되어 있다. 3기에서는 신석기시대의 문양토기가 완전히 소멸되는 대신 민무늬의 목단지〔有頸壺〕·굽다리접시〔高杯〕형토기가 출현한다. 또한 청동손칼〔刀子〕·청동단추가 반출되고 있어 청동기시대로 전환된 단계로 생각된다. 특히 청동손칼은 이 유적의 유물들 가운데서 청동단추와 함께 가장 이목을 끈다. 자루 끝에 고리가 달리고 자루의 아래위에는 턱이졌고 등은 약간 휘고 날은 한 쪽에만 있다. 길이는 18.6cm, 너비는 1.9cm이다.

4기가 되면 요령식 동검과 공반하는 부채동도끼〔扇形銅斧〕와 미송리형 토기가 등장해 본격적인 청동기문화가 정립된다. 5기는 4기가 끝나고 얼마간의 공백기를 가진 뒤 청천강 이남지방에서 유행하고 있던 초기철기시대의 문화가 유입되는 단계이다. 6기는 본격적인 고구려 중기의 문화층이 된다.

각 시기의 유물상으로 볼 때, 1기는 서기전 2000년기 말, 2기는 서기전 1000년기를 전후하는 시기, 3기는 서기전 8∼7세기, 4기는 서기전 6∼5세기, 5기는 서기전 2∼1세기, 6기는 5∼6세기로 편년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신암리 유적은 우리 나라 서북지방 선사문화의 기원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지리적인 위치와 문화사적인 관계에서 볼 때, 당시 같은 문화를 공유하던 중국 요령지방과 압록강 하류지역을 포함하는 공통된 문화권 중 대표되는 한 유적으로도 그 의미가 크다.

참고문헌

『평안남북도 고대집자리』(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지음, 진인진, 2009)
「1965년도신암리유적발굴보고(1965年度新巖里遺蹟發掘報告)」(김용간·리순진, 『고고민속』1966년 3호, 사회과학원출판사, 1966)
「신암리유적발굴중간보고」(리순진, 『고고민속』1965년 3호, 과학원출판사,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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