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집 6권, 속집 6권, 합 6책. 목판본. 1809년(순조 9) 7세손 긍주(肯柱)에 의해 중간되었다. 초간은 1621년(광해군 13) 문인들에 의하여 간행되었다.
1980년 후손들에 의해 ‘파산세고(坡山世稿)’라는 이름으로 원집·속집 외 습유·연보·연보보유·연보부록·삼선생유서(三先生遺書)·신원양현소(伸寃兩賢疏) 등을 묶어 영인되었다. 서문과 발문은 없고 원집과 속집의 권말에 간기가 있다.
원집 권1에 시 61수, 권2·3에 장소(章疏) 66편, 권4·5에 서(書) 76편, 권6에 잡저 3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속집 권1에 시 17수, 권2에 장소 8편, 권3∼5에 서 69편, 권6에 잡저 18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서는 주로 이이(李珥)와 이기론(理氣論)에 대해 주고받은 서한이다. 그는 사칠이기(四七理氣)에 대해 이이와 아홉 차례나 서신을 교환했으나, 4편은 유실되고 5편만이 실려 있다.
이 편지는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하여 이황(李愰)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하는 저자와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하는 이이가 6년 동안에 걸쳐 논쟁한 것이다.
제1서에서 인심(人心)은 형기(形氣)의 사(私)에서 생기고, 도심(道心)은 성명(性命)의 정(正)에서 근원하므로 주기(主氣)·주리(主理)의 차이가 있다고 하였다. 때문에 사단과 칠정도 대거(對擧)하여 사단은 이발(理發)하고 칠정은 기발(氣發)한다고 주장하였다.
제2서에서는 인심과 도심을 대립적이라면 사단과 칠정도 주리와 주기로 설명할 수 있다면서, 이황의 호발설(互發說)이 천하의 정리(定理)라고 주장하였다.
제4서에서는 사람이 말을 타고 다니는 것을 이(理)가 기(氣)를 타고 유행하는 것에 비유하면서 이황의 호발설을 견지하였다. 이는 이황과 기대승(奇大升) 간의 사칠논변(四七論辨)과 함께 조선 유학사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으로 유학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별지는 시사 및 이기·예설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다. 잡저 중 <잡기 雜記>는 인물평·유람기·행사 등을 느낌에 따라 기록한 것으로, 저자의 편모를 엿볼 수 있다. 속집의 서는 송익필(宋翼弼)·이제신(李濟臣) 등과 경전의 문난(問難)과 시사 및 예설에 대해 주고받은 논답이 대부분이다.
<후사서부윤생 後事書付尹甥>과 <후사서시강생 後事書示姜生>은 임진왜란을 당해 유리(流離)했을 때 뒷일을 부탁한 것으로, 죽은 뒤 염습(殮襲)과 가매장 등의 일을 지시하였다. 여기서 도학자인 저자의 사생관(死生觀)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규장각도서·국립중앙도서관·고려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