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강선생창의일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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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강선생창의일록
운강선생창의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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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부터 대한제국기까지 생존한 의병장 이강년의 창의록과 박정수 · 강순희의 종군기를 모아 엮은 의병록.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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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후기부터 대한제국기까지 생존한 의병장 이강년의 창의록과 박정수 · 강순희의 종군기를 모아 엮은 의병록. 전기.
내용

2권 1책. 목판본. 이강년이 남긴 기록에 편자인 박정수(朴貞洙)·강순희(姜順熙)의 종군기를 엮어 목판본으로 간행한 것이다. 권두에 김동진(金東鎭)의 서문이 있다.

권1에 일록, 권2에 일록·보유·격문·서융사졸(誓戎士卒)·고결팔역동지(告訣八域同志)·장임록(將任錄)·지(識)·발(跋) 등이 수록되어 있다.

권1의 일록에는 1895년(고종32) 그가 경상북도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켜 유인석(柳麟錫)의 진에 합류하여 항쟁한 사실, 1907년 3월 재차 의병을 일으킨 후 그 해 말까지의 사적이 일기체로 기록되어 있다.

권2의 일록에는 1908년 1월부터 9월 사형당하기까지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보유에는 일록에 누락된 기사가 실려 있다. 격문은 <격고각도열읍문 檄告各道列邑文>과 <격이등박문 檄伊藤博文>이다.

<장임록 將任錄>에는 그의 의병부대 조직과 주요 종군자의 명단이 제시되어 있다. 이 책은 을미의병보다 정미의병에 비중을 두고 있어 1907년 이후의 의병전쟁을 연구하는 데 긴요한 자료이다.

특히, 일록에는 한국 군대가 해산되어 각지에서 의병전쟁이 벌어지자 황제가 각지 의병장에게 비밀리에 칙령을 내린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칙령에는 “4천년 종묘사직과 3천리 강토가 하루 아침에 오랑캐의 땅이 되었으니, 이강년을 도체찰사로 삼아 짐과 함께 의병은 사직에 순절하라.” , “조서는 비밀히 내리는 것이니 그리 알고 모든 일을 거행하라.”라고 적고 있다.

권2 말미에는 1908년 6월 4일 청풍 작성(鵲城)에서 적과 싸우다가 탄환을 맞아 붙잡힌 사실, 제천·충주를 거쳐 서울에 압송되어 평리원(平理院)에서 공판을 받을 때 담판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의병을 일으킨 동기를 묻는 재판관에게 “너는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어찌 의병이 무엇인가를 모르는가! 나는 왕실의 후손으로 국가의 위급한 때를 당해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다가 불행히 잡힌 몸이 되었으니 빨리 죽여주기를 바란다. 선비에게는 죽음을 줄지언정 욕을 보여서는 안 되는 법이다.”라고 하였다.

9월 19일에 쓴 유서에서는 “내가 노력하여 토벌한 지 13년에 원수의 적을 섬멸하지 못하고 도리어 살해를 당하게 되었으니 천운을 어찌하랴!”라고 하였다. 그의 최후의 말은 “우리나라 2천만 동포가 장차 차례로 나처럼 죽게 될 것이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하였다.

<장임록>에는 역대 의병장과 참모, 그리고 종사(從事)들의 인적사항이 기록되어 있으며, ‘좌종사(坐從事)’라 하여 의병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협력한 사람들의 명단이 적혀 있어 이채롭다.

참고문헌

『운강창의일록(雲崗倡義日錄)』
『독립운동사자료집』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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