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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회
운동회
개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체육운동을 중심으로 한 경기나 놀이를 하는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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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체육운동을 중심으로 한 경기나 놀이를 하는 모임.
내용

학교 또는 일반단체들이 각종의 운동종목을 택하여 경기를 하는 가운데 친선과 우의를 다지고자 실시하고 있다. 특히 학교에서는 중요한 행사의 하나로서, 학생은 물론 가정이나 지역사회를 포함하는 전체로서의 단합과 유대를 강화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

학교운동회는 아동이나 청소년들이 평소의 운동·유희 등의 학습결과를 가족과 이웃들 앞에서 연출하여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고 활동의 실제를 이해하도록 하며, 그 실행에 있어서 기획·조직·운영을 통하여 어린이들이 자주성이나 협력심·책임감 등을 몸에 익히게 하는 교육현장으로서의 의의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승부나 기록을 중요시하는 스포츠경기와는 성격을 달리하여, 무엇보다 전원이 참여하여 공동체의식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나라의 운동회는 1896년 5월 2일에 영어학교(英語學校)에서 평양의 삼선평(三仙坪)으로 소풍을 가서 영국인 교사 허치슨(Hutchison)의 지도 아래 화류회(花柳會)라는 운동회를 열었던 것이 시초가 된다.

당시의 경기종목은 300·600·1,350보경주와 공던지기·대포알던지기·멀리뛰기·높이뛰기·이인삼각·당나귀달리기·동아줄끌기(12인조) 등이었다.

다음해 6월 16일에도 훈련원에서 영어학교대운동회가 개최되었으며, 이후 1909년 학부에서 운동회 폐지 훈령을 내릴 때까지 매년 계속되었다.

1898년 5월 28일에는 훈련원에서 외국어학교연합운동회가 열렸는데, 당시의 경기종목은 100·200·400보경주와 멀리뛰기·높이뛰기·철구·씨름·당나귀달리기 등이었다.

1905년 5월 20일에는 신흥사(新興寺)에서 황성기독청년회(皇城基督靑年會)가 최초의 운동회를 개최하였으며, 1906년 6월 1일에는 지방인 남양사립보흥소학교(南陽私立普興小學校)에서도 공립과 사립소학교 연합운동회를 개최한 바 있었으며, 1907년 6월 10일에 대한체육구락부 주최로 동문(東門) 밖 영도사(永道寺)에서 최초의 민간단체 주최에 의한 운동회가 치러졌다.

이러한 초기의 친선도모적인 운동회 외에 당시의 사립학교에서는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의 일환으로 민족주의적 성격을 띄고 학교연합대운동회를 개최하였다.

이들 연합운동회는 1907년부터 1910년 사이에 봄·가을로 실시되었는데, 규모가 클 때에는 한 도내(道內) 각 군의 학교 전부가 연합하여 대규모의 연합운동회를 실시하기도 하였으며, 대개 그 비용은 도민 전체가 부담하였다.

당시의 운동회야말로 우리 민족의 울분과 교육구국의 의지를 분출시키는 민족투지의 광장으로서, 운동회 때에는 으레 ‘대한독립만세’, ‘황제폐하만세’가 삼창(三昌)되었으며 『독립가』를 부르도록 하였다.

때로는 연합대운동회의 자금이 부족할 경우도 있었는데, 당시 인천에서 열린 연합대운동회 때에는 자금이 모자라자 술장수·역부(役夫)·기생들까지도 이에 호응하여 자금을 보조하였다고 한다.

또한 사립여학교에서도 연합운동회가 자주 실시되었는데, 1907년 5월에 진명여학교 교장 엄준원(嚴俊源)의 발기로 장충단에서 열린 여학교연합대운동회가 그 시초이다.

한편 같은 시기에 학부(學部) 주최의 운동회가 마련되어 1907년 5월 2일에 관·공·사립학교 춘계연합대운동회가 훈련원에서 실시되었다. 이 경기에는 학부대신이 참석하였으며, 육상·체조 및 여흥 종목을 중심으로 수천명의 각 학교 선수들이 경기를 하였다.

같은해 10월에는 다시 관·공·사립학교 추계연합운동회가 개최되어 72개교 6,000여명의 학생이 참가하였다. 이 운동회에는 황태자와 초대통감 이토(伊藤博文)도 참관하였으며, 당시의 규모로서는 최대의 운동회였다.

1908년 5월 비원에서 성내(城內) 관·사립학교 비원운동회가 개최되어 육상경기와 여학생 조화경기(造花競技) 등의 종목에 선수 440명이 참가하였으며, 황제내외가 참석하였다.

이처럼 사립이나 관·공립 할 것 없이 학교운동회를 통하여 민족정신의 고취와 민족단결을 이루어나가자, 일제는 1909년 4월의 관·사립학교연합운동회를 마지막으로 학부의 재정난을 핑계로 연합운동회를 폐지시켰다.

그러나 서울시내의 각 사립중등학교에서는 경비를 공동으로 부담하여 운동회를 계속하였으며, 1910년 5월에 오성학교(五星學校)·보성학교(普成學校)·배재학당(培材學堂)·중앙학교(中央學校)·대성학교(大成學校) 등 8개 학교가 삼선평에서 대성학교운동회를 개최하였다.

이 운동회에는 39개 종목에 300여명의 선수가 참가하였으며, 평양시내의 각 가정에서는 태극기를 게양하여 이를 축하하였다.

특히 민족적 위기를 느낀 1910년 4월부터 6월 사이에는 서울과 지방의 대규모 운동회가 35회에 걸쳐 개최되었으며 1910년 4월 16일에 개최된 웅천사립학교의 운동회에는 지방인데도 불구하고 5,000∼6,000명의 관중이 모인 바 있었다.

그러나 국권상실 후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던 중 1912년 5월 10일에 개최된 제3회 경성내 8개 사립학교 운동회가 청파정에서 개최되었는데 이때 트랙횟수를 세고 있던 기록원의 착오로 장거리 경주에서 불상사가 생겨 난투극 이 벌어지자 이를 핑계로 5월 31일 내무장관이 경찰 총장과 각도장관 앞으로 학령(學令)을 보내 운동회를 중지하도록 강요하였다. 그 이후로는 연합운동회가 개최되지 못하였다.

황제와 황후가 친히 운동회를 관람하는 가운데 참가자들이 조국의 안녕을 기원하는 운동가를 부르며 민족의 애국독립정신을 고취하고자 하였던 시도가 일제의 탄압정책으로 민족적 의거의 싹이 잘리고 만 것이다.

특히 운동회 때 불렀던 운동가에는 우리 민족의 애국사상과 독립정신, 그리고 외세에 자주적으로 대항하는 항일정신이 그대로 반영, 표출되어 있었다.

1907년 5월 2일에 열린 관·공·립학교 춘계연합대운동회에서 당시 군부주사 김유택(金有鐸)이 각 학교 운동가를 통일하여 만든 『운동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大韓帝國 光武日月 富强安泰는

國民敎育 普及함에 專在함일세

우리들은 德을 닥고 智能發하여

文明開化 先導者가 되어봅세다

……중 략……

우리學校 全體明譽 一層빛내세

學徒들아 學徒들아 靑年學徒들

忠君心誠 愛國精神 닛지마시오

이기랴다 지더래도 落心마시오

……하 략……

민족의 독립과 단결을 위한 의지와 상징으로 출발된 근대 초기의 운동회는 광복 이후에도 지역사회의 공동집회와 같은 공동체의식을 가지고 계속되어 각 학교와 지역별로 단결심을 고취시키고 향토애를 발현시키는 커다란 행사로서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학도체육대회, 소년체육대회, 전국체육대회 등 운동경기대회 또는 각종 체육대회로 발전하였다.

현대의 학교운동회는 주로 청홍전·청백전의 대항형식으로 진행되는 것이 대부분이며, 프로그램에 포함시키는 종목으로는 신체발달 단계에 따라 유희·각종 경주·줄다리기·리듬운동·구기운동·기마전·포크댄스·민속춤·단체경기 등 다채롭게 진행된다. 또한 교사·학부형들이나 지역사회의 주민들을 경기에 참가시켜 참여의식을 높이고 더욱 흥미롭게 진행하기도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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