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4월 1일에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은 6,040㎡이다. 은선리 탑리 마을의 뒤에는 천태산이 있고 이 천태산의 중복에는 공주 또는 부여지방에서 볼 수 있는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들이 분포한다. 그 가운데 운학리 고분군은 탑리 마을의 북방으로 면소재지에 이르는 소로 동편에 있는 고분군이다. 고분이 자리한 곳은 천태산에서 서쪽으로 뻗은 지맥이 탑리 마을의 북쪽에서 서북쪽으로 달리는데 거기에 3기의 고분이 분포한다. 편의상 남쪽부터 A · B · C호분으로 명명되었다.
1971년 여름 전북대박물관의 예비조사 결과 도굴사실을 확인하고 그 해 11월 파괴고분의 정리조사를 실시하였다. 이 고분은 은선리의 굴식[橫穴式]돌방과는 달리, 봉분상에 널길[羨道]이 없는 돌덧널[石槨]을 설치하는 구덩식[竪穴式]이다.
A호분은 정상부의 지표 아래 0.16m 지점에서 괴석(塊石)들이 노출되기 시작하여 0.22m 지점에서 바닥이 드러났다. 유구는 이미 심하게 파손된 상태였는데 북벽은 4매, 동벽은 2매, 남벽은 1매의 깬돌[割石]이 남아있었고 돌덧널[石槨]내에는 무너진 돌 3매가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 돌덧널의 장축방향은 정동(定東)을 가리키고 있고, 0.95m의 폭을 가지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바닥은 최하석을 0.15m쯤 묻고 바닥에는 백토를 깔아 다져놓은 흔적이 남아있으므로 이 돌덧널의 길이를 알 수 있었는데 1.7m에 이른다. 이 A호분에서 특기할 사항은 봉분을 쌓는데 있어서 바닥에 먼저 흑색점토를 깔았다는 사실이다. 즉 약간 경사를 이룬 지표상에 중심부는 약 0.6m 높이로 하고 바닥의 주연에 이르면서 차츰 얇게 흑색점토를 깔고 그 위에 황토를 원형으로 쌓아올리고, 그 정상부에 괴석으로 돌덧널을 구축한 다음, 다시 황토로 덮어 만두형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B호분은 높이 2m, 직경 약 13.5m이나, 정상부의 유실이 심하여 원래는 A호분과 비슷한 것으로 쌍분(雙墳)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동편의 복부에 도굴갱이 뚫려있어 이미 도굴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역시 중심부의 지반 위에 약 0.3m 두께의 흑색점토를 쌓아 다지고 그 위에 봉토를 형성한 다음 정상부에 돌덧널[石槨]을 구축한 것 같다.
C호분은 가장 북쪽의 것으로 이 대지의 정상부에 위치한다. 이 고분을 정점으로 하여 이남(以南)은 완만한 송림이며, 이북(以北)은 약간의 급사면을 이루어 지면이 노출되어 있다. 봉토는 대부분 유실되었다. 저변 직경이 13.7m 정도이나 이 역시 도굴되었다. 정상부의 지표아래를 파 내려간 결과 정점에서 남서 방향으로 약 1.5m 떨어진 곳에 돌덧널[石槨]의 동북 모서리가 나타났다. 돌덧널의 내부를 정리한 바 돌덧널의 규모는 길이, 너비가 2.9×1.37m로서 크기가 고르지 않은 괴석으로 측벽을 쌓았는데 동측벽은 거의 교란되고 남벽과 서벽의 일부만 바닥에서 2매 정도만 남아있었다. 바닥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약 2.5˚의 경사를 가지고 있다. 북쪽이 남쪽 보다 0.12m가 낮은데, 이러한 돌덧널의 저면 경사는 피장자(被葬者)가 남침으로 누었음을 짐작하게 하고 있다.
부장품은 이미 도굴되었으나 ①철투겁창[鐵棠]1점, ②파쇄된 용문투조띠꾸미개[龍文透彫敬板]2점분, ③금도은장띠고리[金塗銀裝沽具]1점, ④철제행엽형띠고리[杏葉形沽具]파편 1점, ⑤금도은장식구 1점, ⑥은제칼집끝장식[瑟端金具]1점, ⑦철제손칼[刀子]파편 1점, ⑧철제꺾쇠 1점, 기타 철제관못 등이 있고, 약간의 경질토기(硬質土器) 파편이 있었다.
이 중 ② · ③ · ④ · ⑤는 허리띠[敬帶]의 부품인데, 특히 중요한 것은 용문투조띠꾸미개이다. 이것은 길이 5㎝, 너비 3.5㎝의 철판에 은을 입힌 다음 심히 추상화된 용무늬를 투조하고 그 위에 도금을 한 것이다. 네 귀와 중앙 상하의 6개소에 구멍을 뚫고 작은 못을 박았다. 뒷면에는 베조각이 붙어 있어 포지(布地)로 된 과대의 좌우에 장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철지은장금도(鐵地銀張金塗) 수법은 경상북도 경주 황오리 적석총 출토유물에서도 그 예를 볼 수 있다.
허리띠의 띠꾸미개는 중국 동진계 문물의 유입으로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 · 신라에서는 이러한 옆으로 긴 용문띠꾸미개의 발견 예가 없어 이 형식은 운학리 출토품이 최초이자 유일한 예이다. 이 띠꾸미개와 크기 · 형식 · 수법 등이 가장 유사한 것은 일본 나라(奈良) ‘네코즈카고분[猫塚古墳]’과 오사카[大阪] 사카이시[堺市]에 있는 ‘시치간고분[七觀古墳]’에서 발견된 일이 있다.
중국 진대(晋代)의 띠꾸미개는 장쑤성[江蘇省] 이싱현[宜興縣] 주처묘(周處墓)와 광둥성[廣東省] 대도산묘(大刀山墓) 등에서 나왔는데, 상당히 구상화된 것이다. 운학리나 일본 출토품은 이와 같은 중국계 띠꾸미개의 용문을 당초문(唐草文)처럼 추상화시킨 후행양식이다. 이와 같은 변이과정이 백제지역에서 이루어져 일본 긴키지방[近畿地方]으로 전파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④의 철제행엽형장식편을 복원하면 행엽 둘레에 8개의 못을 박은 셈인데, 한쪽에는 띠고리를 부착시키고 이 못은 포지에 고착시킨 허리띠 끝장식이다. 이것은 경주 천마총에서 같은 형식의 완전한 유물이 나옴으로써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유물의 대비를 통해 보면 이 고분의 연대는 5세기 전반경으로 추측된다. 아울러 동진→백제→일본이라는 동아시아 문물전파과정을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한 일본에 있어서 구덩식돌덧널을 가진 다카쓰카고분[高塚古墳]의 원류가 백제지역에 있었음을 추정하게 하는 증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