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각사 ()

원각사 터 비
원각사 터 비
연극
단체
서울 광화문 새문안교회 부근 야주현(夜珠峴)에 세워졌던 개화기의 사설극장.
정의
서울 광화문 새문안교회 부근 야주현(夜珠峴)에 세워졌던 개화기의 사설극장.
개설

이 극장은 1902년에 협률사(協律社)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협률사가 1906년에 문을 닫자 극장 건물이 한동안 관인구락부(官人俱樂部)로 사용되다가, 1908년 7월 박정동(朴晶東)·김상천(金相天)·이인직(李人稙) 등이 건물을 임대받아 내부수리를 하고 원각사라는 극장을 만들었다.

그들은 전속단체를 재구성하여, 김창환(金昌煥) 등 명창(남자) 40명과 가기(歌妓, 여자) 24명 등 64명의 배우를 두었다. 당대 최고의 국창(國唱) 이동백(李東伯)이 단장이었고, 요식업계의 태두였던 안순환(安淳煥)이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연원 및 변천

원각사는 판소리·민속무용 등 재래의 연희를 주로 공연하였고, 때로 판소리를 분창(分唱)하여 창극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 극장은 새로운 것을 원하는 시대 추세에 따라 창작창극을 시도하였으며, 1908년 11월에는 이인직의 「은세계(銀世界)」를 신연극(新演劇)이라는 이름으로 공연하였다.

원각사는 당시의 다른 극장들처럼 재정적 고충을 겪었지만, 간간히 공연은 지속하였다. 1909년초에 추운 날씨로 인해 잠시 휴관했다가, 1909년 2월 21일 날씨가 풀리자 재개관하였다. 1909년 4월 내부대신(內部大臣) 송병준(宋秉畯)이 조선상업은행 취체역(取締役) 김시현(金時鉉)에게 운영권을 넘기도록 하여 김시현이 맡았다.

그 뒤 공연활동이 활발해져, 경시청(警視廳)의 지시에 따라 1909년 5월에는 전속 창부(唱夫)·공인(工人)들이 일본연극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연습을 하기도 하였다. 원각사는 신연극을 공연하면서도 창극 「춘향가」·「심청가」·「수궁가(守宮歌)」·「흥부가」·「화용도(華容道)」 등을 공연하기도 하였다.

1909년 11월 「수궁가」 공연 이후 실질적인 공연 활동은 중단되었고, 이 건물은 점차 공회당으로 변모해갔다. 원각사는 국민회본부사무소(國民會本部事務所)로 쓰였고, 1910년부터는 연설회장과 연희장으로 가끔 대관되었다. 원각사가 1909년 11월 말 폐지되자, 전속 명창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의의와 평가

원각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극장으로 당시로서는 비교적 좋은 시설을 갖추었으나, 국운(國運)과 함께 숱한 풍운을 겪고 결국 1914년 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 극장은 전문적 극장시설을 갖춘 600석에서부터 최대 천여 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중극장으로 판소리를 분창하여 창극을 만들어냄으로써 근대연극의 기점을 마련하였다.

참고문헌

『한국 근·현대 연극 100년사』(한국 근·현대 연극100년사 편찬위원회, 집문당, 2009)
『한국 근대극장 변천사』(유민영, 태학사, 1998)
『한국극장사』(유민영, 한길사, 1982)
『한국신극사연구』(이두현, 서울대학교 출판부,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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