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래 한국 최초의 근대 학교로 알려진 배재학당보다 2년 앞서 설립된 것이 밝혀져, 한국 최초의 근대 학교로 일컬어진다.
원산은 1880년 4월 개항과 동시에 일본인 거류지가 만들어지고, 일본 상인들의 상업활동이 시작되었다. 덕원·원산의 지방민들은 일본 상인의 침투에 대한 대응책을 세워야 할 것을 절감하였다.
이에 그들은 새로운 세대에게 신지식을 교육하여 인재를 양성하여 외국의 도전에 근본적으로 대응하고자 했다.
1883년 1월에 새로 부임한 덕원부사 겸 원산감리 정현석(鄭顯奭)에게 학교설립기금을 모을 뜻을 밝히고 새로운 근대학교를 설립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정현석은 주민들의 이러한 뜻을 기꺼이 받아들여 당시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인 어윤중(魚允中)과 원산항 통상 담당의 통리기무아문 주사인 승지 정헌시(鄭憲時)의 지원을 받으면서, 관민이 합심하여 1883년부터 원산학사를 설립하게 되었다.
설립 기금은 덕원·원산의 주민들, 원산상회소(元山商會所), 정현석·어윤중·정헌시, 원산감리서에 고용된 외국 군인 등으로 부터 모아졌다. 1883년 8월에 학교 설립을 정부에 보고하여 정식으로 승인을 받았다.
설립 초기에는 문예반과 무예반으로 편성하였다. 문예반은 정원은 없었으나 약 50명의 학생을 입학시켰다. 무예반은 정원을 200명으로 하고 출신과 한량(閑良)을 뽑아서 교육, 훈련하여 별군관(別軍官)을 양성하도록 하였다. 초기의 학생이 250명이나 되었다는 것은 규모가 매우 큰 학교로 출발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특히 무예반을 함께 둔 것은 동래(東萊)의 예를 따른 것으로, 무비자강(武備自强)을 시도한 것이다. 이러한 대응책은 당시 일본의 무력 위협이 수시로 자행되었기 때문에 매우 절실하고,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입학자격은 ① 덕원·원산지방의 연소하고 재주있는 자제로 하고, ② 학교설립에 기금을 내지 못한 지방민의 자제도 차별 없이 입학을 허가하도록 하였으며, ③ 다른 읍 사람이라도 입학금을 가져오는 자는 거절하지 않도록 하고, ④ 무사로서 무예반에 들어와 배우고자 하는 자는 입학금 없이 입학을 허가하도록 하였다.
설립 당시의 교과과목은 공통과목과 특수과목으로 분류하였다. 문무의 공통과목으로는 시무(時務)에 긴요한 과목으로서 산수·격치(格致: 물리)로부터 기기(機器)·농업·양잠·광채(礦採) 등에 이르기까지의 실학을 가르쳤다. 특수과목으로서 문예반은 경의(經義)를, 무예반은 병서(兵書)를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러한 교과목의 교재로 처음 사용하고 비치한 도서는 『영지(瀛志)』·『연방지(聯邦志)』·『기기도설(奇器圖說)』·『일본외국어학(日本外國語學)』·『법리문(法理文)』·『대학예비문(大學豫備門)』·『영환지략(瀛環志略)』·『만국공법(萬國公法)』·『심사(心史)』·『농정신편(農政新編)』 등이다.
이로 보아 원산학사에서 가르친 교과목은 일본어 등의 외국어와 법률·만국공법·지리 등 광범위한 근대 학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문예반의 최초 교수진은 교수 1명과 조교[掌議] 2명으로 출발하였다.
원산학사의 시험방법은 문예반은 매월 초에 월별고사를 부과하여 최우수자 1명을 뽑아, 매년 가을 공도회(公都會)에 보내어 초시 합격자의 정원 명단에 넣도록 하였다.
무예반은 병서를 숙달한 뒤 사격을 익혀 매월 월별고사를 부과하여 연말에 최우수자 2명을 뽑아, 병조에 보고하여 출신은 절충(折衝)으로 특별히 승진시키고 한량은 바로 전시(殿試)에 응시함을 허락하도록 하였다.
학생에 대한 벌칙으로는 ① 태만하여 시작은 있으되 끝을 맺지 못하거나, ② 술집에 출입하거나, ③ 부랑하여 믿을 수 없거나, ④ 교사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자는 경중에 따라서 벌하거나 혹은 제적하도록 하였다.
1894년 갑오경장 무렵에 원산학사는 원래 가지고 있던 소학교와 중학교의 기능이 분화되었다. 원산학사는 문예반만 갖춘 원산소학교로 되고, 원산감리서에서 역학당(譯學堂)을 세워 중학교의 기능을 하면서 소학교 졸업생들에게 외국어와 고등교육을 실시하였다.
원산소학교는 남산동의 같은 자리에 교사를 증축하고 크게 발전하다가 일제 치하에서는 처음에 원산보통학교로, 나중에 원산제일국민학교가 되어 1945년까지 지속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학교이며, 근대 최초의 민립 학교인 원산학사의 설립은 한국근대사에서 매우 큰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첫째, 최초의 근대 학교가 다른 동양권 국가의 경우와 같이 서양인에 의하여 설립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의 손으로 설립되었다는 점이다. 둘째, 정부의 개화정책에 앞서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설립 기금을 모아서 근대 학교를 설립하였다는 사실이다.
셋째, 외국세력과 직접 부딪히는 지방의 개항장에서 시무에 대처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무예반의 병설도 외국세력의 침투를 방어하기 위한 무비자강의 요청에 대응한 것으로 시의적절하고 현실주의적이며 창의적인 것이었다.
넷째, 외국의 학교를 모방하여 설립된 것이 아니라 서당을 개량서당으로 발전시키고 다시 이것을 근대 학교로 발전시켜 전통을 계승한 사실이다. 다섯째, 교재에 있어서도 18·19세기 실학자들이 애독하였던 책들이 신서(新書)들과 병용되어 실학적 전통이 계승되고, 강의과목도 실학을 계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섯째, 학교의 설립에 초기 개화파들이 적극 지원하였으며, 지방 학부형의 요청에 선각적 관료가 적극 호응하여 관민이 일치 협력함으로써 학교의 설립이 이루어졌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