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흥만의 남서쪽에 있다.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에 의하여 1880(고종 17)에 강제 개항되었다. 통상적인 견지에서라기보다는 러시아와 영국의 군사력에 대비하여 일본에 의하여 개항되었다.
1879년 6월 일본의 외무대신은 원산진이 무역에 있어 중요할 뿐만 아니라, 인접 국가에 대한 국방 문제에 있어서도 앞으로 한일간의 이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취지에서 개항을 재촉하였다.
항의 축조는 한일간의 개항예약결정에 의거하여, 일본측의 주선으로 일본인 청부업자 오쿠라(大倉祖)가 원산 춘일정(春日町) 해안에 소규모로 부두를 축조한 것이 처음이다. 그 뒤 1884년 본항에 세관을 설치하였으며 1892년에는 소규모의 방파제를 축조하였다. 그리고 물양장을 축조하였으나 1897년의 대폭풍우로 대파되었다.
1905년 이후 일본인 거류민회의 청원 등에 의하여 조정에서 공사비 6,500여 원을 투입하여 약 8개월간 파괴된 지역을 매립하고 그 자리에 창고를 건설하였으며, 그 뒤 호안매립공사 및 물양장을 건립하였다. 남항과 북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944년 남항의 주요 항만 시설은 안벽이 272m, 물양장이 485m, 정박 면적이 600만㎡였다.
북항은 남항으로부터 약 10㎞ 북쪽에 있으며 무연탄의 적출잔교(積出棧橋 : 부두에서 선박에 걸쳐놓아 화물이나 선객의 이용을 위한 다리)가 기업체에 의하여 개발, 축조되어 광복 전에 무연탄을 일본으로 수출하였다. 1944년 북항의 주요 항만 시설은 안벽이 780m, 물양장이 370m, 정박 면적이 180만㎡였다. 개항 당시 이 항의 무역은 부산에서 상인들에 의하여 행하여졌다.
그리고 일본 상인들이 이 항을 중심으로 무역을 하기 위하여 점포를 개설하고자 할 때에 조계지(租界地) 300평을 대여하여 주었다. 개항 초기의 무역품은 상해의 상품인 이원(利元)이라는 면직물과 사금·약재가 중심이었는데, 이들 상품은 중국에서 일본의 나가사키(長崎)나 부산을 거쳐 원산항에 들어왔다.
1883년 정어리의 대풍으로 더욱더 무역항으로 부각되었으며, 무역 주도권은 청나라 상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광복 후 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은 상실하고, 어항·군항으로서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갈마반도가 자연 방파제의 구실을 하여 항내의 물결이 세지 않고 수심이 깊으며, 조석간만의 차이가 적어 대형 선박의 정박에 적당하여 동해안 굴지의 양항이 된 것이다.
더구나 경원선·함경선·동해북부선·평원선 등이 원산을 중심으로 발달하여, 육상교통의 요지일 뿐만 아니라 관북의 관문으로서 큰 구실을 하고 있다. 성진·청진·나진항의 발달로 그 배후지가 다소 좁아지기는 하였으나 지리적·군사적·교통적 위치는 여전히 관북의 관문으로서의 구실을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