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원주(原州)이며, 자는 천계(天啓)이다. 태자첨사(太子詹事) 원관(元冠)의 아들이다.
1106년(예종 1) 4월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학문으로 이름을 떨쳐 왕의 신임을 얻었다.
1109년 합주통판(陜州通判)이 되었다가 임기가 끝나자 권지직사관(權知直史館)이 되었으며, 이듬해 이듬해 어서유원관(御書留院官)을 역임한 후 이어 맹주부사를 가 되었다. 1129년(인종 7)에는 소부주부(小府主簿)로서 추밀원당후관(樞密院堂後官)을 겸하였으며, 1131년 합문지후(閤門祗候)를 거쳐 이듬해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서 서경유수판관에 올랐다가 이어 상의봉어(尙衣奉御)가 되었다.
서경 출신 묘청(妙淸)·조광(趙匡) 등이 서경천도를 꾀하므로 이들의 처벌을 엄중히 주장하다가 남경소윤(南京少尹)으로 전직되었으나 곧 복직되었다.
1134년 안변도호부부사(安邊都護府副使)가 되었으며, 상사봉어(尙舍奉御)를 거쳐 병부와 형부의 원외랑(員外郎) 형부낭중(刑部郎中)을 역임하고 1144년 사재소경(司宰少卿)에 제수되었다. 이어 공부시랑에 임명하려 하였으나 규정에 어긋난다는 유사(有司)의 반대 때문에 장작감(將作監)이 되었다.
1146년(의종 즉위) 예부시랑에 올라 어서검토관(御書檢討官)을 겸하였으며, 이어 국자좨주(國子祭酒)가 되었고 이듬해 조청대부(朝請大夫)가 가수(加授)되었으나 여러 번 표문(表文)을 올려 치사(致仕)할 것을 청한 끝에 11월 검교태자태보(檢校太子太保)로 치사하였다.
1149년 8월 용흥사(龍興寺) 덕현원(德賢院)에서 죽자 9월 건덕산(健德山) 서쪽 기슭에 장사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