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4월에 조선일보사가 창간한 『월간조선』은 창간 당시 30∼40대의 일반인을 상대로 한 학술취향의 논문류를 많이 실어 초기에는 학자나 대학원생들의 호평을 받았다. 수준 높은 지식인의 요구에 부응하는 월간잡지가 없다는 판단 아래, 상당한 수준의 논문들을 많이 실어 대학가에서 자료로 인용되는 등 고급 잡지로서 평가받기도 하였다. 또한 주로 정치·경제·문화 등 사회전반을 종합적으로 정리·분석·평가하고 시사적인 문제를 그 달의 특집으로 꾸며 심층취재를 통한 문제점 파악에 주력하다가, 1982년 3월호부터 다큐멘터리와 르포 종류의 글을 싣기 시작하여 젊은층의 독자를 많이 확보하였다.
그러나 점차 너무 많은 독자를 확보하기 위하여 상업적인 측면이 강조되는 편집경향을 보여 흥미 위주의 읽을거리와 대중적인 편집내용으로 채워지면서 총 면수가 400쪽이 넘는 일반대중잡지처럼 되어버렸다.
그 동안의 특집을 살펴보면 「민주의 길」(1980년 4월호), 「공화제, 이상과 현실」(1980년 5월호), 「지도자 그는 누구인가」·「전환기와 지식인」(1980년 6월호), 「일제침략사탐구」(1983년 2월호), 「마르크시즘의 현재―마르크스 사후 백년」·「기호란 무엇인가」(1983년 3월호), 「기업·기업인」(1983년 8월호) 등이다.
이러한 학술취향의 특집과 아울러 창간호부터 학술자료를 위한 논문기사색인을 계속 실어 일반인을 위한 학술의 보편화를 시도하였다고 할 수 있다. 또, 각계각층의 필자로 망라된 시평의 성격을 띤 ‘조선논단’이 상설되어 그때그때의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한 의견을 모으기도 하였다.
1981년 4월호부터는 원색화보와 단색화보를 본격적으로 실어 시각적인 효과를 높이려 하였다. 딱딱한 학술경향에서 후퇴하여 이렇듯 대중취향으로의 방향전환은 다큐멘터리 「5·16군사혁명」이 1982년 3월호에 실리면서 비롯되었다. 계속해서 「4·19와 장면(張勉)정권의 붕괴」(1982년 4월호), 「워싱턴과 서울의 정치드라마」(1982년 5월호), 「의령 궁류면 참사현장」(1982년 6월호), 「서울과 동경 14년-박정희(朴正熙)·사토정권의 외교드라마」(1982년 7월호), 「시간강사-대학의 파출부」(1982년 9월호), 「실록 김창룡(金昌龍)」(1982년 10월호), 「경기고와 서울고」(1983년 2월호), 「월남파병」(1983년 8월호) 등이 실렸다.
이러한 글들은 같은 필자가 연속적으로 몇 가지를 독점하여 썼기 때문에 편집진들의 필자선정의 정실을 지적할 수 있고, 덧붙여 회고나 과거 지향의 이야깃거리를 대량 게재함으로써 독자들을 현실문제로부터 떼어놓는 현실도피사상을 은연 중에 조장하였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치·경제·사회·문화·시사 등의 보도를 통해 독자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국민의 정서함양과 민주시민의 자질을 키우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특히 『월간조선』과 같은 신문사 발행의 월간잡지들이 시사성을 갖게 된 중요한 기술적인 변화는 컴퓨터 조판의 도입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창간 3주년이었던 1983년 4월호부터 본문 조판에 전산 사진식자를 도입하여 잡지의 속보성을 저해했던 제작기간을 단축시켰다.
이렇듯 창간 당시의 학술 중심에서 1980년대 중반 저널리즘 중심으로 성격을 변모시켜왔던 『월간조선』은 정치적 격변기였던 1980년대 후반기 들어 정치 저널리즘으로 정체성을 확립해 나아갔다. 한편, 우리나라 잡지 중 세로쓰기를 마지막까지 유지해 왔던 『월간조선』은 1999년 4월호 창간 19주년 기념호를 계기로 그동안 유지해왔던 세로쓰기 체제를 가로쓰기로 체제로 바꾸었다.
이념 전선의 오른편에서 반공이념의 수호자로서 1990년대의 아젠다를 찾아가기 시작했던 『월간조선』은 ‘사상논쟁’에 치우친 기사들을 많이 게재함으로써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서는 경우가 많아졌고, 따라서 잡지의 우(右)편향에 대한 비판이 많이 제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