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헌문편의 “옛날에는 자기 자신을 위해 배웠지만, 오늘날은 남을 위해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에서 비롯되었다.
인간 존재는 마음과 몸의 두 요소로 구성되는데, 이 중에서 몸보다 마음이 더 근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에는 또 변하는 부분(人心)과 변하지 않는 부분(道心)이 있는데, 이 중에서 변하지 않는 부분이 더 근본이 되는 것이다.
마음의 변하지 않는 부분은 ‘물에 빠진 어린이를 건지고 싶어하는 마음’, ‘부모를 보고 싶어하는 마음’ 등이다.
그런데 이는 누구에게나 항상 존재하는 공통적인 것으로서, 이를 밝혀 마음의 명령대로 살게 되면 남을 자기처럼 사랑하게 되어 현실적인 모든 갈등이나 부조화가 저절로 해소된다.
이러한 마음은 사람들이 태어날 때 모두 가지고 태어나지만, 자라면서 남과의 경쟁에 진력함으로써 차차 잃어버리게 되므로 사람들은 잃어버린 마음을 다시 찾아야 하는 숙제를 갖게 된다. 이 잃어버린 자기 자신의 본 마음을 찾기 위해 하는 학문이 위기지학이다.
맹자는 이러한 학문을 ‘잃어버린 마음을 다시 구하는 것’이라 표현했고, ≪대학≫에서는 명명덕(明明德), 즉 밝았던 덕을 다시 밝히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위기지학을 함으로써 자신의 본 마음을 밝혀 그것을 실천하는 이상적 인간이 성인(聖人)으로 규정되므로, 위기지학의 목적은 구체적으로 성인이 되는 것으로 귀결된다. 우리 나라에서 전개된 학문은 이러한 위기지학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일찍이 이색(李穡)은 인간과 하늘을 하나로 전제하고, 하나일 수 있는 조건으로 마음의 세계를 제시해 마음을 밝힐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마음을 밝히는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 성(誠)과 경(敬)의 실천이었다.
조광조(趙光祖)는 “말을 사랑하는 것, 꽃을 사랑하는 것, 거위나 오리 기르기를 좋아하는 것 등은 마음을 바깥의 사물에 달리게 하여 반드시 진흙에 빠지게 되므로 끝내 도에 들어갈 수 없다(外間有愛馬者 有愛花草者 有愛養鵝鴨者 若馳心於外物 則必至着泥 而終無以入道).”라고 설명하였다.
그런데 도는 본 마음을 따라 행하는 길로 해석되기 때문에 조광조의 이 말은 바깥 사물을 좋아하는 위인지학보다 도에 들어갈 수 있는 위기지학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황(李滉)은 ≪주자서절요≫ 서문에서 “나의 참다운 삶의 길을 위해 성현을 알 필요가 있고, 그 때문에 성경(聖經)과 현전(賢傳)을 공부하는 것”이라고 자신의 학문적 성격이 위기지학임을 명백히 하였다.
이이(李珥)는 <자경문 自警文>에서 스스로 경계하기를 “먼저 자기의 뜻을 크게 가져 성인으로 준칙을 삼아야 할 것이니 조금이라도 성인에 미치지 못하면 나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라고 성인이 되기 위함을 목적으로 하는 자신의 학문적 성격을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