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건영 ()

근대사
인물
대한제국기 때, 최익현 의진에서 항일의병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국권 침탈 이후 창씨개명에 반대하는 항의문을 작성하여 박해를 받다가 자결한 의병장 · 열사.
이칭
석전, 石田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3년(고종 20)
사망 연도
1940년
본관
문화(文化)
출생지
전라남도 곡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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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대한제국기 때, 최익현 의진에서 항일의병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국권 침탈 이후 창씨개명에 반대하는 항의문을 작성하여 박해를 받다가 자결한 의병장 · 열사.
개설

본관은 문화(文化). 호는 석전(石田). 전라남도 곡성 출신. 아버지는 유봉묵(柳琫默)이다. 농촌의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약관의 나이에 거유(巨儒) 최익현(崔益鉉)과 기우만(奇宇萬)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생애 및 활동사항

그 때 위정척사사상과 구국을 위하여 사생취의(捨生取義)하는 대의(大義)의 도를 배워 망해가는 조국을 건지고자 결심하게 되었다. 최익현이 의거의 기치를 올리고 순창을 중심으로 의병운동을 전개하자 이에 입진하였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의진이 패배하여 최익현과 임병찬(林炳瓚) 등이 대마도(對馬島)로 압송되고 의진이 해산되었다. 시세가 의병운동 전개에 불리함을 깨닫고 농촌에 들어가 일제의 삼엄한 감시하에서도 청년자제들을 교육함으로써 그들의 애국애족정신을 고무하여 장래 민족의 역량을 성장시키려 하였다.

그 뒤 일제는 국권을 강탈하고, 이어서 만주침략을 감행한 뒤 총독부는 내선일체(內鮮一體)니 일시동인(一視同人)이니 하는 미명 아래 사실상 한민족을 영원히 말살시키기 위하여 창씨개명을 추진하였다.

이에 이를 극력 저지하기 위하여 항의문을 전달하였다. 이로 인하여 일제의 모진 박해를 받고 울분을 참을 수 없어 자결, 순국하였다. 광복 후 곡성의 유지들이 뜻을 모아 무산사(武山祠)라는 사당을 세우고 해마다 순국한 날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석전유고(石田遺稿)』
『곡성향교지(谷城鄕校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집필자
박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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