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양(晉陽). 아버지는 지영광군사(知靈光郡事) 유혜방(柳惠方)이다.
문과에 급제해 감찰어사가 되었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고 공민왕이 남쪽으로 피난할 때, 먼저 이천(利川)의 농장에 도착한 뒤 음식을 장만해 왕에게 올렸다.
이에 왕은 유숙(柳淑)에게 “유구(柳玽)의 오늘의 정의는 잊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 때부터 여러 벼슬을 거치면서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에 이르렀다. 1373년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를 지냈다.
이 때 환관의 폐해를 열거하고 인원도 줄일 것을 건의하였다. 1380년(우왕 6) 밀직부사, 1389년(공양왕 1) 예문관대제학을 역임하면서 강화도에 있는 창왕을 죽였다. 이듬해 양광도도관찰사(楊廣道都觀察使)가 되고, 1392년 조선 건국으로 전주가 완산부(完山府)로 승격되자 그곳 부윤이 되었다.
1395년(태조 4) 정당문학(政堂文學)·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를 역임하였다. 이 때 회암사(檜巖寺) 등에 파견되어 소재법석(消災法席)을 열었다.
이 해 명나라에 갔다가 표전문(表箋文)에 무례한 문자가 있다고 하여 억류되었다. 이때 본국으로부터 진천군(晉川君)에 봉해졌으며, 이듬해 겨울에 귀국해 1397년 삼사우복야·예문춘추관대학사가 되었다.
임종을 앞두고 아들 유겸(柳謙)에게 “왕의 크나큰 은혜를 입고도 보답을 못해 통한스럽고, 노모가 아직 살아 계신데도 끝내 효도하지 못해 통탄스러우니 할머니 모시기를 내 생전과 같이 하라.”고 훈계하였다. 사람됨이 효성스럽고 근검하며 겉치레에 힘쓰지 않았다. 시호는 정평(靖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