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영광(靈光). 자는 경정(景正). 아버지는 대언(代言) 유두명(柳斗明)이다.
음직으로 계성전직(啓聖殿直)이 되고, 1426년(세종 8)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어 권지훈련녹사(權知訓鍊錄事)·군기시녹사·선공감직장(繕工監直長)·진주판관·사헌부감찰 등을 지냈다. 또한, 황해도경력(黃海道經歷)·원평부사(原平府使)·평양소윤·한성부소윤을 역임하였다. 1453년(단종 1) 장령(掌令)을 지낼 때 권력층에 대한 언사가 격하여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으로 좌천되었으나, 이듬해 집의(執義)가 되었다.
1455년(세조 1) 첨지중추원사·형조참의와 황해도관찰사 겸 병마절제사를 역임하였으며, 이듬해 호조참의가 되었다. 1457년 경주부윤으로 있을 때 소송을 제기한 자가 뇌물을 바치자 장살(杖殺)하여 파직당하고, 남원에 돌아가서 오랫동안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1468년(예종 즉위년) 아들 유자광(柳子光)이 익대공신(翊戴功臣)이 되자, 행첨지중추부사(行僉知中樞府事)로 등용되었다. 이어 자헌대부(資憲大夫)로서 지중추부사에 올랐으나, 늙음을 이유로 물러날 것을 요청하여 고향으로 내려갔다. 성품은 곧고 절도가 있으며, 백성들을 다스리는 재능이 뛰어나 부임하는 고을마다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가정에서도 엄격하여 자식을 대할 때에도 반드시 관대를 갖추었고, 아들 유자환(柳子煥)이 귀하게 되었어도 오히려 종아리를 때렸다. 죽음에 임해서는 자신의 상사(喪事)를 일체 주자의 『가례(家禮)』에 의하도록 유언하였다. 시호는 정숙(貞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