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에 일본에서 유학하던 중, 1909년 1월 동경에서 설립된 재일본 한국 유학생 단체인 대한흥학회(大韓興學會)의 설립에 참여하였다. 윤기현(尹冀鉉)·변희준(邊熙駿) 등과 같이 대한흥학회의 운동부를 맡아 모국을 방문, 운동을 지도하였다.
같은 해 여름방학인 7월 21일 25명의 부원이 경성의 훈련원에서 서양선교사 야구팀과 경기를 가져 19:9로 승리, 장안의 관심을 집중시킨 바 있는데, 이때 투수로 활약하였다. 이들은 7월 24일부터 평양·개성·선천·안악·철산 등지를 순회하며 야구 지도를 함으로써 초창기 우리나라의 야구발전에 밑거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