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복만 ()

근대사
인물
개항기 임오군란 당시의 군인.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55년(철종 6)
사망 연도
1882년(고종 19)
관련 사건
임오군란
정의
개항기 임오군란 당시의 군인.
개설

무위영(武衛營) 소속 포수로서 임오군변을 주동하였다. 유도문(柳道文)의 아들로, 어머니는 김소사(金召史)이며 동부(東部) 사근절리(沙斤節里)에서 살았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82년(고종 19) 6월 5일 13개월 분의 군료가 지급되지 못한 상황에서 전라도의 조미(漕米)가 도착, 선혜청의 도봉소(都捧所)에서 구훈련도감 소속의 군병들에게 급료로서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지급된 것은 겨우 1개월 분으로, 더욱이 질이 아주 나쁜데다 양도 차지 않았다.

이에 격분한 군병들이 군료의 수령을 거부하며 항의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유복만은 동료인 김춘영(金春永)·정의길(鄭義吉)·강명준(姜命俊) 등과 함께 고직(庫直)을 구타하면서 앞장섰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선혜청 당상 민겸호(閔謙鎬)는 군관에게 명하여 군병들을 탄압하는 한편, 유복만 등을 분쟁의 주동자로 지목하여 포도청에 가두었다.

뒤이어 이들에 대한 처형이 있을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6월 8일 유복만의 동생인 유춘만(柳春萬)은 김춘영의 아버지인 김장손(金長孫)을 찾아가 무위영 군병들의 봉기를 촉구하는 통문을 작성하였고, 그 자신이 장두(狀頭: 이름이 첫머리에 적힌 사람)가 되었다.

이 통문에 따라 그 다음날 군민이 함께 봉기하여 군변이 일어났으며, 포도청에 갇혔던 유복만 등은 이 때 석방되었다. 석방된 이들은 군민을 거느리고 군변을 확대시켰는데, 특히 그 다음날 궐내에 난입하여 민겸호와 경기감사 김보현(金輔鉉) 등의 살해를 지휘하였으며, 명성황후가 타고 있던 사인교를 파괴하였다.

그러나 7월 13일 대원군이 청군(淸軍)에 의해 피랍되고 군변이 실패하자, 군변의 주모자로서 김장손·정의길·강명준·홍천석(洪千石)·허씨동(許氏同)·윤상룡(尹尙龍)·정쌍길(鄭雙吉)·문창갑(文昌甲) 등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에 재차 수감되었다.

그 뒤 8월 23일과 24일 양일 간에 금위영에서 추고(推考)가 있었다. 이때 유복만은 김춘영의 위협에 의해 대궐에 침입하였음을 밝히고, 사인교를 파괴하는 데도 가담하였음을 시인하였다. 모반대역부도(謀反大逆不道)로 확정되어 8월 25일 군기시 앞에서 능지처사되었다.

참고문헌

『임오대역부도죄인장손등국안(壬午大逆不道罪人長孫等鞫案)』
「임오군변」(권석봉, 『한국사』 16, 국사편찬위원회, 1975)
집필자
권석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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