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일명 시연(時然). 자는 박여(璞汝), 호는 성남(星南). 경상북도 안동 출신.
1882년 향리의 대평학숙(大坪學塾)에서 유연각(柳淵覺)으로부터 한문을 수학하였다.
1896년 안동의병장 권세연(權世淵)의 막하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하면서 적에게 큰 타격을 주어, 유선봉(柳先鋒)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안동의진이 해산한 뒤, 영남지방으로 남하한 김하락(金河洛)의진에 가담하였다.
1906년 봄 경주 분황사에서 열읍(列邑)의 의병대표들과 회맹하고 총대장에 추대되어 진보·영덕·평해 등지에서 전투를 벌여 전과를 올렸다. 1907년 한국군 강제해산 후 이강년(李康秊)이 격서를 보내와 함께 활약할 것을 요청하자, 군사 수십명을 거느리고 삼척방면으로 가서 이강년을 만났다.
이 때 친일파 박두일(朴斗日)의 계략에 빠져 군졸들이 흩어지자, 격분하여 울진십이령(蔚珍十二嶺)에서 박두일을 사살하였다. 이어 영양·청송·안동 등지에서 유격전을 벌여 전과를 올렸다. 1908년 부하 57명을 거느리고 의성 갈곡동에서 왜병을 습격하여 성과를 올리고 영양 북면에 잠복하였다.
1911년 8월 만주로 망명하여 이상희(李象羲)·김동삼(金東三)·안창호(安昌浩) 등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남북만주일대가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기에 최적지임을 깨닫고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1913년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밀정의 밀고로 5월 영주 반구왜경소(盤邱倭警所)에 붙잡혔다.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1914년 1월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